교회나 신앙의 타락은 기본적으로 그 정체성의 변질이 논제가 되어야 하지만 보통은 그 행위의 변질이 척도가 되고 있다. 이것은 잘못된 것, 아니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다. 행위가 척도가 된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정체성을 떠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변질이나 타락을 논하기 어렵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회에서 종교의 타락과 변질을 이야기할 때 이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이젠 사전적 의미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타락이나 신앙의 변질은 행위의 변질이나 타락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행위로서 의로워지려고 나아가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타락했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사람들이 자기 옳을 대로 행하는 것이며, 간음한 것이며, 타락한 것이며 여호와의 신이 떠난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비유된 불륜의 예로 본다면 하나님과 혼인(하나님의 의가 내용이 되고 자기 삶이 형식이 되는 하나됨)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가는 모든 인생이 바로 문란한 자들이며 그런 모든 사람의 삶이 다 타락한 것이고 범죄한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말하는 <큰 교회>가 사회적인 기준이나 심지어 법적인 기준을 넘어서는 타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온전한 곳에 있다가 타락한 것이 아니라 원래 타락한 자리에서 타락한 자리로 옮겨간 것에 불과한 것이다. 한 마디로 회 칠한 무덤의 회 칠이 벗겨진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타락의 관점으로 본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형식으로 살도록 지으신 것을 떠난 그 자체가 타락인 것이다.


바로 앞선 포스트에서 칼의 비유에서도 그렇다. 칼을 만들기 위하 철이 칼이 되지 않고 다른 것이 되었을 때 그것은 존재의 목적을 상실한 것이다. 그 상태에서는 제 아무리 대단한 것이 되어도 칼로 만들기로 한 주인의 의와 뜻으로 볼 때 타락이고 죄악인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타락이라는 개념을 재 정립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타락은 목적을 이탈한 것이지 행위가 나빠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무거운 짐이고,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개념을 수용하기에 큰 교회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명시해 둔 것이다. 그들에게 타락은 오직 행위의 변질에 입각한 것으로만 여겨질 것이기에 목적에서 떠난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이므로 이러한 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장님이 색(color)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생명은 그 생명으로 나고 난 다음에는 다시 다른 생명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생명의 아버지고, 하나님의 의로 거듭난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생명으로 난 사람을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졌다고 하신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졌다는 것이 생명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졌거나 아니거나 하는 것이지, 반만 그리스도인이라 하거나, 아직 부족하니 노력할 뿐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은 생명의 법을 모르는 소리다. 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큰 교회에서 말하듯 사람은 부족하니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할 뿐이라고 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생명이 아니라는 자백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타락과 변질은 근원적인 문제로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을 본질로 알고 그것을 세상과 자기 삶의 내용으로 순종하고 채워서 그 본성으로 사는 것에서 떠나서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고서 성경을 행위로 지켜내려고 하는 신앙을 가졌다는 그 자체가 근원적인 타락이다. 교회나 종교인이 세상의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거나 법을 어기는 것과 같이 행동의 변질을 타락이나 변질로 볼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원래 타락한 상태에서 그냥 칠한 것이 벗겨진 것이고, 감추려 했던 것이 드러난 것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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