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교회에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흔히 교회라고 하는 곳은 건물 위에 네온사인으로 십자가를 걸어 놓았고, 내부적으로는 신학이라는 학문으로 공하고 경쟁하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목회자라고 높은 곳에서 서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된 일이며, 그렇게 세상 사람들과 남다른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며 그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성경대로 행동하고 살아야 한다고 설교하는 교회를 말한다. 이런 교회를 나는 규모에 관계없이 <큰 교회>라고 지칭한다. 크고 높은 곳을 지향한다는 의미이다.


이 큰 교회는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선 글에서 비유했듯 이 큰 교회들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이기에 그들의 타락은 문란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온전한 자리에 오른 적이 없기에 불륜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즉 결혼한 적도 없는 처녀 혹은 총각과 같은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타락이 불륜이라고 할 때 큰 교회가 세상의 가치관을 좇는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타락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즉 지금부터 이야기는 온전한 생명을 아는 교회들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는 것은 온전한 교회를 맛 본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 글들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까지는 가능하고, 때로 그 내용에 감정적인 흥분이나 분노 혹은 동의는 가겠지만 그런다고 자신들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임을 분명히 해 둔다. 지난 일요일에도 앞서 이야기 한 큰 교회에 다녀왔다면 알 수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교회는 먼저 생명이 있어야 한다. 생명의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에 생명이 없을 수 있겠는가 싶겠지만, 교회의 태생에서 그 교회의 생명력을 가늠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의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자신과 동일한 사람을 찾아서 모이게 되었다면 생명이 있는 교회지만, 그렇지 않고 형식과 절차에 따라 설립(設立)되었다면 생명이 없는 ‘조직교회’라 할 수 있다. 생명은 속에서부터 나고 로봇과 기계와 같은 제조물은 틀이 정해진 상태에서 조립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은 고유한 본성이 있고, 그 본성이 가진 ‘다움’이 있다. 사과라는 생명은 그 나무와 열매를 특성 짓는 본성이 있다. 나무의 어떠함과 꽃의 어떠함과 또 사과 열매의 어떠함이 있다. 그것은 유전자(본성)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나무와 열매를 보면 ‘이건 사과다!’고 할 수 있는 고유한 특성이 바로 유전자로부터 온 본성이다. 이 블로그에서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의 본성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나타나는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그리스도의 본성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 말은 언어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속심령을 표현한 모든 것을 말한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이 사람이 세상에서의 성공이 인생의 목적인지, 아니면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소비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려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 사람의 기도제목을 보면 알 수 있고,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바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람의 행동과 말은 그 사람 속에 있는 의와 가치관이 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블로그에 글이 1,500개가 다 되어 가는데 어쩌면 이때까지는 여기 까지만 설명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생명에 대하여 본성을 이야기해 왔는데 그것이 ‘여기까지’라는 것이다. 생명은 그 본성대로 표현하는 것이 있고, 그리고 표현된 생명이 그 생명 다운 것인지는 연속된 다음 단계지만 또 다른 깊은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사람으로 치면 태어날 때 사람이라는 유전자를 가지고 나서 죽지만 않으면 사람이라는 동물적 행동, 유전적인 본성을 표현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사람이 사람답게, 또 사회가 바라는 것을 수용하는 사람다움을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관점인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 가치관이 큰 교회의 신앙과는 다르다.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 삶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의 간절한 추구와 거리를 둔다. 그것은 생명의 본성에서 기인된 것이다. 도무지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귀하게 여길수 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이 크고 높은 것을 추구하는 것에 회의가 들거나, 그것을 바로 잡아야겠다고 나서는 것과는 다르다. 그런 것은 신념이지만 이것은 생명의 법이다. 마음에 동의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신념은 좌절이 있지만 생명을 인함은 좌절이 없다. 항상 그렇다.


그런데, 그렇다고 다 된 것은 아니다. 물론 생명이냐 아니냐의 문제로 한정하여서 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신앙적 문제로 본다면 구원을 받았느냐 아니냥의 문제로만 신앙을 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 편의 글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구원은 시작이지 끝이 아니라고 언급했듯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의 삶이 거기서 그치는 것이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서 생명이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의를 가진,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그 자신과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을 찾고 만나서 교회가 되었을 때 생명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이 진정 생명이 있는 교회의 출발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시작한 교회는 성도들 서로에게 하나님의 생명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비로소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라가 되면 그 나라가 지향하는 것이 있고, 통치가 있으며 통치는 그 나라 다운 모습을 요구하고 구성원은 그것을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본성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통치가 순종되는 것이다. 말을 듣고 판단하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의 유전자에 순종하는 것과 같은 순종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가 생명의 온전함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하나님이 세운 교회가 된다. 하지만 신학이나 교회법에 의하여 총회나 노회의 규정에 의하여 설립된 교회는 제도가 세운 교회지 하나님이 세운 교회가 아니다. 그래서 이 글부터는 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미리 언급을 했던 것이다. 그런 교회는 사실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그건 그냥 조직이고, 조직 공동체며, 종교단체일 뿐이다.


다시 돌아와서 생명은 그 생명의 본성이 있고, 또 본성들이 서로 공감하는 생명다움이 있다. 생명이 있는 교회가 타락이나 변질이 된다면 그것은 먼저 그 생명다움의 상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생명다움의 상실을 회복하지 못하면 생명사회에서의 도태적 성격의 격리를 당할 것이다. 그리고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이것은 교회도 개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런 것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생명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자기 안에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시는 본성이 있어야 한다. 그 본성이 있다면 적어도 그리스도의 본성만 있으면 된다는 말씀 앞에 ‘그러면 그리스도의 본성만 있으면 죄를 지어도 되느냐?’와 같은 의문이 생기거나 질문을 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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