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교회의 변질 10 - 생명의 변화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8. 7. 6. 08:08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의 세계는 생명의 세계이고, 생명의 세계라는 것은 본성이 행동으로 표현되는 세계이다. 따라서 생명의 세계는 본성이 있고, 이 본성은 하나님의 풍성하심에 따라 아주 다양하게 표현된다. 생명이 가진 유전적 특성은 하나지만 그것은 다양하게 표현된다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유전자와 생명은 하나지만 각 사람이 가진 다양한 본성이 있듯,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도 각 육신이 가진 육신의 다양한 형질에 따라 표현되는 것이다.


한 사람도 그 성경이나 생김새가 같지 않고, 쌍둥이라 할지라도 살면서 습득한 것에 따라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이 육신을 가진 사람의 본성이다. 그 다양한 사람의 본성들이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심령에 심기고, 그것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거듭난 생명이 되고 나면, 생명이 가진 고유한 법, 곧 본성이란 내용이 육신이란 형식으로 표현되는 법을 좇아, 하나님의 생명이 각 육신이 가진 다양한 본성과 성격과 학습된 가치관 등을 통하여 표현되고, 이러한 다양한 표현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의 풍성함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이 세계를 알지 못한다. 물론 이 글과 같이 문자로 적혀 있거나 사람이 말로 설명을 하면 그 언어적 표현을 알아듣는 것은 문제가 없겠지만 그것이 자기 것인 것과 머리로 아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자라서 성인이 되면 결혼에 대하여 누구나 다 알지만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과 결혼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인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도 그 장성함이 있어서 그리스도의 풍성함에 이르기 까지는 가만히 있는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가만히 있어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졌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에게서 아이가 태어나서 불행하게 일찍 죽는다고 사람이 아닌 것이 아니듯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기만 해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십자가에서 회개한 강도와 같이.


그러나 그렇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은 각자가 가진 육신의 어떠함에 따라서 표현되는 것도, 장성함도 다르다. 신앙의 변질이라는 것을 사용하는 것은 바로 이 차이에서 비롯된다. 변질이란 개념을 사용함에 있어 온전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알지 못하고 행위의 신앙에서 행위가 사회적인 문제가 되는 것으로 전환된 것을 변질이라고 여기는 어두움도 있다. 이것을 앞에서 근원적인 타락이며 생명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서 그 생명다움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있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생명을 맛본 다음의 변질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겉치레와 외식하는 것을 이야기해 보자.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외식하는 자들의 모습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것이고, 겉치레를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표현함에 있어 겉치레를 좋아하는 본성을 인하여 복음을 화려하게 표현하고 싶어하는 마음의 차이이다. 이것은 전혀 다른 것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하게 보인다. 그러나 외식하는 것은 신앙의 근원적 타락이고, 겉치레는 복음을 복음답게 표현하지 못하지 못한 모습이라는 차이가 있다. 상태에 따라 다르겠지만 굳이 이야기한다면 그것을 변질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이라는 것이 유전자에 의한 육신의 형성이란 과정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생명의 법이라고 한다. 특정한 유전자를 가진 존재는 그 유전자의 특성을 반영한 형태로 태어나고 육신을 갖추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한 가지는 그 표현됨이 각각의 유전적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된다. 피부가 검다고 사람이 아닌 것이 아니고, 씨가 없는 청도 복숭아라고 복숭아가 아닌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며, 그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존재 목적을 가지고 계시며, 크고 위대하며 높은 곳에 오르는 세상에서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과 같이 더 의롭지만 죄인과 종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것을 자기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사실 그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 그리스도의 본성을 표현함에 있어 그것을 알게 된 삶의 시점까지 형성된 육신의 특성대로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다양하고 독특하며, 한 개인의 삶이 세상에서 유일하듯 하나님의 성품을 독립되고 특화된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표현은 변화를 수반한다. 삶이 계속되면서 자신이 표현한 그리스도의 생명에 대한 세상과 사람의 반응을 수용하고 또한 그리스도의 생명이 표현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되새김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육신으로 같은 삶을 살지만 거룩하게 구분된다. 거룩이 구분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 구분은 세상의 가치관을 좇아 사는 사람들은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가려고 하고 바벨탑을 쌓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이 본성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은 애매하게 고난 받으며, 의인임에도 죄인이 되는 십자가의 삶을 산다.


그 삶이 영위되면서 배우고 자라는 것이 있다. 여기서 교회와 말씀과 기도가 수반되는 것이다. 생명이 자라기 위하여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들끼리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떡을 떼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구하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이지, 기도한다고, 신학한 자가 교회를 만들고 모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의 주제에 입각해서 보면 그런 시도가 타락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