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알려면(5)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7. 6. 12. 23:11 Writer : 김홍덕

<성경을 알려면>이라는 이 글의 진정한 목적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어떻게 확신할 것인지에 대하여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다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자 합니다. 물론 그 이유부터 하나님의 계획에 합당해야 합니다만 그것은 다른 글들에서 많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오늘 내 모습으로 바로 할 수 있느냐?>로 가늠하는 것이라고 가이드를 제시하긴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언제나 이야기하듯이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어 그 의가 육신의 삶으로 나타나게 되면 그 나타난 자신의 삶을 보면 부인할 수 없게 됩니다. 아쉽게도 이것은 간증적인 측면이 큽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성경 대부분의 말씀이 간증적인 기록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책이라는 것이 그것인데, 자신이 확증하고 경험한 것을 기록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자신의 이야기와 사건으로 느끼고 확신하고 싶다면 자신 안에서 자신을 성경대로 살게 하는 이끌림을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연습이나 노력이나 신념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생명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나는 것이고, 생명이 있으면 부인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노력하므로 생명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소나무를 뽑을 정도의 간절함으로 “믿습니다!”를 반복적으로 외친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을 수밖에 없고, 스스로 부인하려고 온 힘을 다해 부인해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자기 안에서 나올 때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안에 그렇게 확신하는 삶을 이끌어내는 본성이 들어올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내 안에 모실 것인가가 핵심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이 다섯 번째 글은 그것을 간략하게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주제 ‘성경을 알려면’을 마칠 것입니다.


사람은 질그릇과 같고 항아리와 같아서 항상 무엇을 담으려고 합니다. 그러한 본성으로 인하여 사람은 자기 속사람을 어떤 것으로도 채우고 있는 상태입니다. 간혹 사람들은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다시 넣을 것이 정해지지 않았는데 비워봤자 귀신이 나갔다가 친구들까지 데리고 들어간다는 말씀과 같이 될 뿐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무엇을 자기 마음에 담을 것인지가 정해지면 그 이전에 가지고 있던 것은 버리자 말라고 해도 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진주장수의 비유입니다.


그런 본성을 가진 사람은 그 속에 무엇을 채웠느냐에 따라 정체성이 정해집니다. 그릇도 그 안에 담긴 것에 따라 이름 곧 정체성이 정해집니다. 간장이 담기면 간장 그릇이 되고, 소주가 담겨 있으면 소주병이었다가 참기름이 담기면 참기름병이 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즉 사람은 겉모양이 본질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것이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은 그 속에 하나님의 의를 담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 몸이 거룩한 성전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생명이 있는 삶에서 그 심령에 하나님의 의를 담고 있으면 그 삶이 심령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어 그 본성대로 살게 되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의를 담을 것인가 하는 것만 알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보고 들을 때에 그 영상 곧 이미지(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그 형상도 이미지임)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시시하게 느껴질 정도의 상식처럼 들리겠지만 핵심은 사람에게 들어가는 이미지는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보는 강아지의 영상은 사람 안에서 이미지가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을 자신이 보고 들은 것으로 살게 하는 생명의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고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본 것대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하는 유일한 것은 바로 사람이 보인 모습, 그것 하나인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천사로 오셨다면 우리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는 그와 같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만난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위를 쪼개고 돌을 불사르는 능력과 모습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하나님을 만나기도 전에 우리는 다 가루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능력으로 인지할 수 있는 모습으로 오시는 하나님 외에는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때에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가는 하나님의 사자가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는데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다른 모습으로 와 봤자 사람이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만나겠습니까? 그게 가능하다고 믿거나 심지어 그렇게 신비하게 만나야 하나님을 만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장담하건데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모르니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교회조차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주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육신을 가진 인생의 정체성을 보이신 것은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이 어떤 이유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금식한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단서와 같이 돌을 먹을 수 있고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죽지 않는 우리와 다른 육신을 가질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보이신 우리 육신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가 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 성경의 모든 말씀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 안에 성경과 또 말씀으로 들어오면 그것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잉태되고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람이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어 그 의가 삶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볼 때 그 이미지와 같은 하나님의 의가 우리 심령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되어 우리가 거듭나므로 그 생명, 곧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게 되는 것이고, 그 삶이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의 모든 것을 믿게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며,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확신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삶과 생명의 본성이 된 사람의 말과 삶을 듣고 보는 것에 있습니다. 그 시작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와 뜻이 그 육신을 가진 삶으로 또 말씀으로 나타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본 제자들이 처음에는 예수님을 자신과 다른 존재로 보았지만 나중에 성령의 감동을 받고서는 예수님의 모든 것이 자신들과 같은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보이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육신으로 오셔서 자신들과 같은 성정을 가지고 말씀하시고 사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육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이신 예수님의 이미지가 제자들의 심령에 심겨졌고 그 심겨진 것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이 강림하시므로 그들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성경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 확신에 가질 수 있는 것이 속에서부터 나오도록 사람인 제자들의 속사람에게 들어가고 심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반복되어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의 말과 삶을 보아야 성경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확신에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 것이 없다면 속사람에 심긴 것이 없는 것이니 성령으로 잉태될 것도 거듭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와 같을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알려면, 부인하려해도 부인할 수 없는 삶의 모습을 이끌어내는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정하신 의의 본성이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거하려면 그 의로 사는 사람의 말을 듣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을 듣고 봐야 그것이 우리 안에 심기는 것입니다.


목사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나,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교양이 있어야지?’와 같은 겉모습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면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봤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있어 그것을 말하는 것을 들으니 그 말하는 것이 지금 나의 모습으로도 충분히 따라 갈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함을 알았다면 그 말에 순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의가 자기 안에 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그것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성경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로 살아가는 모습을 서로 나누고 서로를 보면서 믿음의 확신을 가지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사람들이 모이면 그 생명이 같으므로 형제입니다. 그 형제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서로의 아버지가 같음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동체고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는 것을 보고 들는 것이 우리의 양식이 되어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면 사는 삶으로 이끌고 그 삶을 볼 때 하나님을 믿는 자신의 믿음을 부인하려해도 부인할 수 없는 확신을 가진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성경을 알기 위하여 걸어야 하는 최종적인 모습이고 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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