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알려면(3)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7. 6. 11. 13:00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엄청난 모험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살아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살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태신앙’이라고 해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나면서부터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모태신앙도 철이 들면서 자신이 가진 신앙에 대하여 검증을 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시작하는 것이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과 같은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하나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인생과 세상과 신앙을 자신의 안목과 가치관으로 보기 때문에 성경과 하나님이 생소해 보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것은 조건입니다. 


그래서 이 시작을 두고 성경은 “땅(인간)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생소함과 무지)은 깊음 위에 있고(무지함은 깊으며), 하나님의 신은 수면(모든 이론과 철학과 생각) 위에 운행하시니라(하나님의 말씀은 그 모든 물-철학과 이론-과 다르게 그 위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믿고 떠났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자신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을 자신의 삶의 본질로 삼았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가치관이 아닌 하나님의 안목을 자신의 안목으로 삼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으려는 마음, 성경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어디라도 떠나야 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설교를 비판하고 여러 외침들을 분석하면 그 설교와 외침들 중 어느 하나가 자신을 부지불식중에 하나님의 모든 것을 믿고 있는 상태로 옮겨 주기를 바라고 있다면 단언하건데 그런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종과 같은 부류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어디라도 따라가려 할 때 어떤 것을 따를 것인가에 대하여 앞선 두 개의 포스트에서 단서를 제시해 보았습니다. 이 글을 읽고 또 하나님을 믿고자하는 당신은 분명 사람일 것이기에 사람으로서, 또 당신이 가진 육신으로 살아가는 삶을 가진 이로서 지금 당장 가치관만 바꾸면 할 수 있는 것을 좇으라는 단서를 제시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저의 제안이지 모든 사람이 바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어느 것이라도 해 본다면 어느 것도 하지 않은 사람보다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알 것입니다. 자신이 따라 나선 말씀의 진위 여부는 알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그것을 수용하고 따라 갈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그 하나는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처음 글에서 제시한 두 번째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어렵게 어떤 설교나 말씀을 따라 나섰는데 그것이 진리인지 어떻게 검증할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처음보다 더 어려울 것 같지만 만약 어떤 말씀을 따라 나설지에 대한 기준을 ‘사람인 자신이 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했다면 처음보다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했더라도 인내는 필요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몇 가지 믿음의 확신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변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수가성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면 네 안에서 생수가 넘쳐날 것”이라고 하셨고, 제자들에게 성령을 말씀하시면서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이 생각나고 깨달아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단순한 말씀이 아닙니다. 단순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에게와 또 제자들에게 깨달음을 주신 말씀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른다는 것이고, 성령이 자신에게 없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공부해야 아는 사람,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 사람, 매주 가서 성경에 대한 말씀을 들어야 되는 사람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성령이 없다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뿐 아니라 성경 대부분을 사람들은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합니다. 지킬 수 있겠다 싶으면 그대로 지키고 지키기 어렵거나 그렇게 하면 손해가 난다 싶으면 의미만 받습니다. 이런 관점은 여러 문제를 낳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누구는 할 수 있고 누구는 할 수 없는 것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목사, 신부, 수녀와 같은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의 생업을 교회나 성당이 책임지는 명분 중에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라는 것이 있을 정도면 틀리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수가성 여인에게 하신 말씀을 본다면,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너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군지 안다면’ 네 속에서 생수가 넘쳐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속에서 생수가 넘쳐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매주 설교를 준비해야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함에 있어 공부해야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잠시 준비해서 넣어 뒀다가 꺼내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보는데 자기 이야기 같지 않다면 이는 그 속에 성령이 거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이 계신다면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예수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다 알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성령도 예수님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들을 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증거>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서 그 증거가 나올 때 비로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믿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내 안에 믿음의 증거가 있고, 내가 그것을 인지할 수 있으며, 그 인지한 것이 분명한 것이라고 믿어지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고 확신할 수 있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믿음의 증거를 자아 밖에서 찾습니다. 이는 우선 출발이 잘못되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여정을 떠날 때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분별하여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할 수 없는 길을 시작하면 당연히 그 길에 대한 믿음 역시 남에게 의지해야 합니다. ‘어떤 유명한 목사님이 그러더라’는 식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분별하여 나선 사람은 얼마의 시간이 걸리긴 해도 언제나 믿음을 분별함이 자기 안에 있습니다. 결국 그런 분별이 자기 안에서 확신하는 바를 낳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어 그 나타나는 바를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심긴 것이 있다는 것인데, 심겼다는 것은 나와 그 심긴 것의 정체성이 연결되고 일치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믿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믿는 것을 확신하기 위하여 자기 밖의 증거를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자아 밖의 증거는 분명하고 공통되며 변치 않는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나의 자아 밖에 있는 증거는 어느 한 구석 분명히 나로선 할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믿음은 언젠가는 금이 가기 마련입니다.


유명한 목사님이 그렇게 말했기에 믿는다고 한다면, 일단 나는 그렇게 유명하지 않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목사님이 유명해지는 과정을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유명해지는 과정을 거쳐서 나온 말인데 그 과정이 없는 사람이 그 말만 듣고 그것을 믿으려 하면 언젠가는 한계를 드러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적을 믿으려 한다면 그것도 같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분명하게 나와 다른 믿을만한 능력이 있는 것 같지만 결국 나는 그렇게 할 수 없기에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시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기적을 행한다면야 이전에 그럴 수 없었는데 그렇게 된 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주장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무엇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와 같이 내 안에 없는 것은 믿을 수 없습니다. 믿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믿어서도 안 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믿어야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면 내가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이 아니거나,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복음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그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이 아닙니다.


(계속)

'김집사의 뜰 > 복음 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을 알려면(5)  (0) 2017.06.12
성경을 알려면(4)  (0) 2017.06.12
성경을 알려면(2)  (0) 2017.06.10
성경을 알려면(1)  (0) 2017.06.09
성경과 민주주의  (0) 2017.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