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알려면(2)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7. 6. 10. 11:26 Writer : 김홍덕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보는 것’이라는 수많은 외침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하여 먼저 이야기 했었습니다. 그것은 그 가르침을 우리 자신이 따라할 수 있느냐는 것, 그 자리에 이를 수 있느냐의 것인데, 많은 수고와 노력 끝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내 모습 그대로 이를 수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관점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전반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예수님과 같아질 수 없다면 사실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그렇게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웅이라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영웅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되고자 함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것이 성경을 바로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바로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을 보는 견해가 달라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렵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좀 솔직해진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예수를 믿어 입고자 하는 은혜는 대부분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 중에서 우리 육신을 가진 인생 이상의 일을 사모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병원에서 고치지 못하는 병을 고쳐주셨으면 바라고, 또 때로는 가벼운 병이라도 병원에 가는 번거로움 대신에 기도 한 번 하면 쾌유케 되기를 바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도 살리셨지만 우리는 죽은 사람 살리는 것은 고사하고 기침도 참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이르는 자리가 그런 기적을 일으키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어야 합니다. 간혹 어떤 이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키기는 하나 그렇다고 우리가 그것을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기적이나 예수님의 기적은 기적이 목적이 아니라, 그 기적으로 설명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있으신 하나님께서 보이신 능력의 한 모습이지 그것이 우리가 이를 자리로 여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어서 보통의 사람들일 할 수 없는 일을 이루여 합니다. 피라미드의 조금 더 높은 곳에 이르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이르러서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에 왔다”고 간증하는 것이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고 여기기에 끊임없이 그것을 바랍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하는 것은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피라미드는 위로 갈수록 자리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는데 자신이 만든 사람의 능력을 모를 리 없습니다. 또한 능력이 부족해서 사람을 이 모양으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도 인정하지 않는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할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을 채우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보이셨지만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것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따라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면 세상에 좋은 신앙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예수님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 얼마 안 되는 사람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런 고생을 했다고 믿는 것이 예수 잘 믿는 것입니까? 바로 그런 기대와 생각으로 예수님을 믿으려하기 때문에 어떤 외침이 온전한 것인지 혼돈스럽기도 한 것입니다. 무엇이 더 자신의 기대를 채워줄 수 있느냐를 따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떤 주식을 살까 고민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은 우리 인생의 한계와 정체성입니다. 그것을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입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세상이 추구하는 것을 좇으려 하면 어떤 세상의 기준이 나타나서라도 죄인이 되게 하는 존재이나 그런 자신의 모습을 인정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아들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그 모습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게 하실 계획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렇게 보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도 아리송하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자신의 기대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성경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싫어하는 이 연약함과 또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많은 부분에서 부정하게 보이는 우리의 정체성이 하나님께는 보기 좋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 모습 그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공부해서 우리의 이 모습으로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해 낼 수 있는 사람이 되려하기 때문에 성경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외침을 따라 갈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 고민을 해부하듯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로서 할 수 없는 것을 어떤 외침이 해 줄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위로 올라가는 것은 늘 어렵고, 또 높은 자리는 늘 모자라나 내려가는 것은 쉽고 또 언제나 거할 곳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하여 ‘이것이 온전한 관점’이라는 외침이나 ‘이렇게 믿어야 온전한 것’이라는 외침이 제 아무리 많아도 우리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인정하지 않을 뿐.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의 삶과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 그것을 이야기 할 때 온전한 것이라는 그 관점을 좇아간다면 절대로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주신대로 그 능력대로 하는데 무엇이 잘못되겠습니까? 그럴 리도 없겠지만 설사 그렇게 된다면 적어도 그것은 사람의 책임은 아닙니다.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많은 관점들을 들어보면 우리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리 마음의 욕심과 세상에서 이기려는 가치관으로 볼 때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는 그곳이 바로 온전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할 수 없지만 여기 와서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된다.’는 것은 그 ‘열심히’를 내가 할 수 있느냐와 또 ‘도달한 자리가 과연 낮은 자리인가?’를 생각해보면 온전한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이 따라 나설 때는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은 어디에 버리고 빌라도의 뜰에서 채찍질 당하는 모습을 볼 때, ‘저 예수는 또 누구인가?’ 근심했고 매 맞는 예수는 자신이 따라온 예수가 아니기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따라 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기대한대로 세상의 임금이 된 예수님의 좌우에 앉은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회피할 기적을 일으키며 지금까지 살고 있는 제자도 없습니다. 그들도 다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서 살다 죽었습니다. 단지 그 육신으로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목적대로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대로. 


그런데 왜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겠다며 오히려 반대인 위로 가려하고, 이 육신 이상의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라 생각하면서 그것을 기대하고 그 기대를 채워줄 곳이 어떤 곳인지를 살피다 세월만 보내고 있을까요? 그러면서 정말로 어떤 외침이 하나님을 바로 알려주는 외침인지 알기 어렵다는 근심만 하고 있어야 할까요? 그것이 아니라면 이 글을 시작할 때 던진 두 가지 문제, <무엇이 제대로 된 외침인가?> 하는 것과 <따라나선 것이 진리임을 어떻게 알 것인가?> 중에서 첫 번째 의문은 해결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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