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은 가난을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니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사람들이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가 주님이자 그리스도라는 말에 자신들의 어두움을 깨닫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답을 구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 2:37)

 

이에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이 말은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에게, 그 사람이 얼마가 되었든 그들을 위한 말씀이라고 했다. 이에 세례를 받은 사람이 삼천 명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들의 회개는 베드로의 설교 때문이다. 즉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말에 회개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생각을 돌이켰다는 뜻이다.

 

세례라는 말은 물에서 건져낸다는 의미다. 물은 또한 율법이니, 율법으로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이 바로 세례다. 세례는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고백이다. 또한 겉모습과 외모가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한다는 생각은 선한 생각이 아니라는 고백이다. 선한 것이 날 수 없다는 나사렛에서 와서, 가난이라는 사람의 외모와 행위를 의롭게 하는 게 그리스도라는 믿음 아니 신념을 버리는 게 세례다. 이것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받는 건 행위와 외모가 의로워야 하나님 앞에 의로워진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

 

이러한 세례를 받으면 또한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하셨다. 따라서 성령의 강림과 충만은 행위로 의로워지는 신앙에서 돌아서는 연장선 상에 있다. 행위가 초라하고 가난을 해결하는 게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걸 돌이켰더니 갑자기 신비한 기적을 행하게 되는 성령을 받는다는 식의 생각은 예수 이름으로 세례받은 게 아니다. 행위로 의로워지는 신앙에서 돌아섰더니, 초자연적인 행위를 일으키는 성령이 오신다? 이렇게 무턱대고 세상에서 잘 되려는 자기 정욕을 좇는 신앙을 추구하는 건 그저 미신일 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이 아니다.

 

선물은 받는 사람에게 유익하다. 주는 사람 역시 이를 위해 준다. 주는 사람은 가졌고 받는 사람에게 합당할 때 선물이다. 머리가 없는 사람에게 헤어드라이어를 주는 것처럼 주는 사람에게 유익하지 않고 별 쓸모가 없는 걸 주는 건 선물이 아니라 조롱이다. 성령을 선물로 준다는 건 받는 사람이 성령의 정체성에 합당하다는 뜻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는 성령을 받으려면 그 믿음과 성령이 그와 같은 일을 하시는 분이란 걸 믿어야 한다. 그런 사람에게만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는 성령을 받으려면 그 믿음과 성령이 그와 같은 일을 하시는 분이란 걸 믿어야 한다.

 

만약 성령을 기적을 행하는 신비한 영으로 믿고 그 신비한 능력이 육신의 문제, 가난과 질병과 사회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고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없다. 우선 성령은 그런 일을 행하는 분이 아니다. 그리고 가난과 질병은 외모와 행위의 영역이다. 그 속에 살 수 없다는 고백이 세례다. 성령은 그 고백이 있는 믿음을 생명으로 잉태케 하신다. 이게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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