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5:1-11) 장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6. 7. 10:55 Writer : 김홍덕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받고 답을 하고서 예수님으로부터 “내 양을 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지 베드로전서의 마무리인 5장에 들어서서 양 무리를 치는 것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은 아니고, <장로>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도 장로라고 언급함과 함께.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장로’와 지금 우리가 교회에서 만나는 ‘장로’는 그 정체성이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이제 새삼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교회가 아닌 사회적인 경쟁력으로 교회의 장로가 된 사람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맡긴 장로가 정체성이 같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둘의 차이를 구분하고자 한다면 무엇을 기도하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세상과 나라를 구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면 이 시대의 장로고, 성도들이 스스로를 반추할 수 있는 신앙 고백과 말씀을 내어 놓는다면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장로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장로를 정의하기를 자신과 함께 했고,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며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함께 했다는 것은 베드로 사도와 육신으로 합석했거나 같은 조직에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길거리에 떨어진 사과도 사과 안에, 사과로 함께 있는 것과 같이 베드로 사도와 동일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라는 말씀이고,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는 것은 그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림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심과 같이 자기 삶이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나타날 영광에 참예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 아들의 영광이 나타났듯, 자기 삶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인하여 살아감에 따라 그 삶을 보고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사람들이 그 모습에 자신을 반추하여 봄으로서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어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이 나타나는 역사 속에 원인으로 또 증거로서 함께 하게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양 무리를 치는 일을 부탁할 때에 장로들에게 부탁을 한 것 자체가 장로의 정체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특히 베드로 사도는 양 무리를 치는 것을 부득이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득이하게 하지 말라는 것은 쉽게 억지로 하지 말라는 것이며, 이는 의무나 다른 목적을 가지고서 하지 말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는 억지로 한다는 것이라고 하면 강압에 의하여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장로라는 신분 때문에 무언가를 하게 된다면, 예를 들어 전날 야근을 하고서 피곤하고 쉬고 싶지만 장로이기 때문에 특별 새벽기도회에 가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또 기왕에 교회에 다니는 것 교회 안에서 직분을 가지고 이것저것 해 볼 수 있는 장로가 좋게 여겨져서 하는 것은 목적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장로는 베드로 사도와 같은 생명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개들은 어디에 있어나 개(dog) 안에 있습니다. 그와 같이 시대가 언제든, 장소가 언제든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앞선 글에서 고난을 이야기하면 이야기한 그 모든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것이 육신의 삶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바로 베드로 사도와 함께 한 사람이며 장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장로는 예배시간에 높은 곳에서 기도하고 교회 안에 조직의 장을 맡을 수 있는 차별화된 자격으로 자리매김한 지금의 장로들과 사뭇 다릅니다. 지금의 장로들은 헌금 많이 하는 것으로 대접 받는 것을 구매한 사람들이지 낮은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 없이 단지 사회적인 안목으로만 봐도 알 수 있을 지경입니다. 그런 꼴로 고난의 증인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때로 어떤 장로들은 세상에서 곤고한 일들을 이겨내고서 소위 말하는 성공이나 재기에 성공한 사람들이 자기가 겪은 고난을 간증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은혜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그 사람의 곤고한 시절이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 주었는지에 있는 것이지, 그 사람이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을 겪고 만회한 것이 고난의 증거는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런 것을 고난이라고 하고, 경제적, 사회적 회복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런 것을 의로 여기시는 신이고, 하나님의 일은 그런 일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 정도는 하늘에서 말씀만 하시면 다 되는 것이고, 더욱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가난하게 오실 이유도 없고, 무엇보다 죄인이 되어 죽으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진정한 장로는 우리가 알듯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사회적으로 유력한 사람이 임직식 때 많은 돈을 헌금해서 안수 받는 것과 같이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장로가 되는 것은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어 그 생명을 인하여 예레미야와 같이 하나님과 관련된 것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는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그런 생명이 그 속에 잉태되고 거듭남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가진 사람은 베드로 사도가 말씀한 것과 같이 베드로 사도와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생명이 같은 사람입니다. 또한 육신이 평안을 바라지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인하여 자기 의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앞에 죄인이 되어 육신으로 수고하고 섬기는 것을 스스로 금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인하여 그 모습을 본 사람이 스스로를 반추하여 자신이 자기 의를 좇아 살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는 영광된 것을 보고 참여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장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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