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미가의 말씀은 그 대상이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미가 선지자들에게 산들과 쟁론하고 작은 산들에게 듣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전하시는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선지자들의 외침은 이방인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나의 경우는 오히려 니느웨라는 이방인의 도시를 향한 선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와 미가 선지자는 그 분위기가 다릅니다. 요나서에서는 대상이 이방인이기에 선지자 요나가 말씀을 전하는 것을 꺼려 도망가는 것을 물고기로 잡아다가 전하게 하시기까지 하시는 긍휼이 있습니다.


그러나 미가나 호세아와 같은 말씀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과 신앙과 가치관이 간음하는 것에 대하여 맹렬한 분노를 표하십니다. 이는 사뭇 다른 것인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기까지 긍휼을 베푸시나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들이 가진 스스로의 의로움에 대하여는 진노하심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논쟁을 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서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방법과 의로움과 가치관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산과 같이 높아져 있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가치관은 높아지는 것이 아닌데 높아지는 것이라는 형태적인 문제도 있지만 그 높아지려는 마음과 높아진 것이 하나님 앞에 더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바로 세상의 가치관에서 온 것이고 그그 세상의 가치관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간음하듯 결합된 것이기에 사마리아를 논하고 발람과 발락의 일 이후에 이스라엘이 모압 여자들과 간음한 것을 상기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말씀은 단지 미가의 시대에 하신 말씀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럴 값이라면 오늘 우리가 읽도록  성경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미가를 읽는 것은 오늘 우리 가운데도 하나님께서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하시고자 하셨던 말씀과, 말씀하시고자 하는 대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어쩌면 오늘 우리 가운데서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들에게 향하는 말씀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그들이 가진 의로움과 하나님은 변론하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이런 것’, 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하나님을 믿으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have to do).’라고 하는 것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산들이라는 것이고 그것과 하나님께서 변론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6장의 서두에 이어서 어쩌면 미가서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하나님께 경배할까?>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믿는다는 이들과 변론하시면 그 중에서 그 변론의 의도를 알게 되는 사람들이 보이는 고백, 아니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고백이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변론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하셨다는 것을 언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자주 언급하시는 것은 애굽이라는 곳이 바로 높아지는 것을 의로 여기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 높아지는 것이 의롭고 선한 것이라는 세계에서 종노릇하던 사람들을 구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나라를 세웠는데, 다시 이방인의 가치관을 하나님을 믿는 의로움에 혼합시켰기 때문에 늘 이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미가를 통하여 발람과 발락의 일을 말씀하십니다. 이 발람과 발락의 일은 민수기 22장에 나오는 유명한 사건(나귀가 말을 하는)인데, 여기에서 발람이라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할 것을 사주한 발락이 모압의 왕이고, 이 사건에 이어지는 민수기 25장에서 이스라엘이 모압 여인들과 간음한 사건이 이어지는데 그것을 상기시키시는 것입니다.


이는 사마리아가 야곱의 수치라고 시작하는 미가의 말씀과도 이어져 있고, 사람의 공로로 하늘에 이르려 한 니므롯과도 뿌리가 같은 것입니다. 특히나 모압은 롯의 두 딸이 아버지를 취하게 하고 아버지와 동침하여 낳은 아들 중  하나입니다.(첫째 딸의 아들) 롯의 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하나님의 자손을 이어가고자 해서 아버지의 씨를 훔친 사건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롯의 딸들은 자신들이 동굴에 아버지와 남게 되자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제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아버지의 후사를 잇자.’라며 시작한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근친상간, 그것도 아버지와 딸이 아이를 낳았다는 불륜적인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걱정하고, 무엇보다 자신이 가진 의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고 한 것에서 바벨탑과 맥락이 같은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모압의 여인들, 곧 모압의 겉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여인들과 간음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들이 크고 화려하게 교회를 짓는 것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크고 아름다워야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이 세상적인 가치관이고, 자기들 생각에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서 경쟁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롯의 두 딸이 아버지와 동침하는 사건과 뿌리가 같은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모습들,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과 같이 높아지고 크고 위대해지는 것에 기인한다고 여기는 오늘날의 모습을 대변하시는 것입니다. 즉 교회를 크게 짓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여기는 것이 사마리아요, 바벨탑이요, 모압이요 그런 것과 간음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질투하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속 좁은 신이라서 질투나 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라고 창조한 인생들이 하나님을 표현하라고 주신 육신과 그 표현된 물리적 세계 안에서의 가치관으로 방향을 거슬러 거꾸로 그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것,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이라고 영혼을 상실한 것을 책망하시는 것이 질투하신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과 변론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그 백성을 구하신 것을 말씀하십니다. 즉 세상이 선하게 여기고 의롭게 여기는 가치관에서 구하심으로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싯딤(출애굽 출발지)에서 길갈(가나안 땅 입성지)까지를 상기시키심도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애굽의 종살이와 같이 피라미드와 같이 높아지려는 가치관을 가지고 살면서 종과 같이 살아가는 것에서 구원을 받은 그대로 십자가까지 낮아지시고, 오히려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종과 죄인이 되심을 표현하신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 우리의 존재 본질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이것을 우리와 변론하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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