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6장, 막 14장, 눅 22장, 요 18,19장)


잡혀서 심문을 받게 된 예수님은 여러 가지 송사에 답을 하지 않으시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라는 질문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에만 “내가 그로라”,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하셨다. 그것은 한 마디로 죄를 자청하신 것이다. 그 두 질문에만 답하지 않으셨다면 빌라도의 말과 같이 몇 대 맞을 수는 있었어도 십자가를 지실 일은 없었다. 예수님도 그것을 모를 리 없었지만 예수님은 그 질문들에만 대답 하셨다.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군병들에게 순순히 잡혀 오신 것만큼이나 이것은 비상식적인 일이다. 


예수님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였다면, 이렇게 잡히시지도 않았겠지만 어떻게 심문받는 자리까지 왔다고 해도 능력을 보이면서 심문하는 자들을 혼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럴 수 없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십자가로 자신을 끌고 가는 군사들을 하늘의 군사를 불러 물리 칠 수 있었음에도 끌려 온 이유와 같은 이유로 그 많은 송사와 고소 중에서 자신을 죽음으로 이끄는 대답만 답을 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라는 존재의 생명 본성이 그렇게 이끄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본성은 예수님만의 본성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가고, 하나님의 아들이자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스스로 죽음 앞에서도 부인할 수 없는 예수님이 보이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사람의 존재 목적이자 삶의 의미다. 존재 목적을 안다는 것은 모든 것이 회복 되었다는 의미다. 자기 존재 정체성을 벗어난 죄에서 회복되었다는 의미다.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가고, 하나님의 아들임과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회복된다는 것이 곧 구원이며 생명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그것을 자기 정체성으로 순종하면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끌려가시고 굳이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답변만 하시는 모습을 볼 때 그것이 자기 안에서 부인할 수 없다면 구원을 얻는 것이지만,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를 이해하려 애쓰고, 신학 같은 이상한 것으로 공부하고 해석하는 것은 구원을 얻지 못한 모습의 상징이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예수님과 동일한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동일한 그리스도라는 본성으로 거듭났다면 자기 본성이 그리스도일 것이고, 예수님과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의 모든 것이 의문스럽지 않고 이해될 것이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의 본성은 모두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신 것과 심문 받으시는 고통과 십자가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신념과 사명감으로 보는 것은 구원은커녕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도 모르는 것이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또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말이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모르시지 않았건만 그것을 선언하신 것은 우선은 그것이 명백한 진리이기 때문이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며, 또 그리스도로 거듭난 모든 사람들의 신분이요 정체성이며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간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본성이 된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이며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분명하신 것이다.


특히 아들이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다.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인생의 삶의 본성이 된 존재가 아들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기에 그리스도이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존재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이 자기 육신, 곧 자기 삶이 된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가 바로 아들이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은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굴복 시키며, 물 위를 걷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아니 그래야 한다는 생각과 전혀 다른 존재다. 더욱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놀라운 능력으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잘 생각해보면 결국 사람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능력 있는 시종이다. 이런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사람들은 하나님 아들에 대한 자기 생각에 매몰되어 있다.


그런 이유로 심문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더더욱 하나님 아들이라 인정하기 힘들다. 심문을 받으시는 예수님은 그리스도는 죽은 자를 살리는 존재라고 믿는 이들의 관점에서 볼 때 어느 한 구석, 어떤 모습도 하나님 아들다움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이 하나님 아들이며 유대인의 왕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 아들이며 유대인의 왕이라면서 하나님 만든 세상에서 일개 졸병과 여종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다. 더욱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에게 조차.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며, 유대 왕의 모습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인들이란 부류들은 하나님께 육신과 세상의 문제 해결을 바라고 의지하면서 빌라도의 뜰에서 심문 받고 채찍질 당하는 예수님을 여과 없이 하나님 아들로 믿는 놀라운 맹신을 보여준다. 말 그대로 맹신, 아무 것도 모르면서 믿고 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그리스도며 하나님 아들이라 생각하면서 채찍질, 침 뱉음 당하고 있는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모순인데 그것을 신앙이라고 하고 있다.


예수님은 심문 받으시는 자기 모습 그것이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신다.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말씀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삶의 모습, 가치관과 본성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이 인정되고 자신도 그것을 흠모하며 더 나아가서 그렇게 살지 않으려 해도 자기 안에 있는 어떤 본성이 자신을 그렇게 이끌고 가는 것을 보지만 어쩔 수 없는 존재가 된 자신을 보게 될 때 그것이 바로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다.


그렇지 않다면 제 아무리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노라 외치고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내어 준다고 해도 아무 소용없다. 정말로 직설적으로 설명하면 예수님께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을 기도하고, 그것이 성취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며, 세상의 가치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 아들의 본문이고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자기 생각엔 구원 받았고, 거듭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다 허구다. 


심문 받으시는 자신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정의하신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는 이와 같이 오늘날 신앙인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이 가진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들의 모습과 완전히 다르다. 정 반대다. 오히려 그 반대의 가치관이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있다. 이것마저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구원은 없다. 채찍질 당하면서까지 그 매 맞는 모습이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그들의 신앙 속 그리스도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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