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6장, 막 14장, 눅 22장, 요 18장)


제자들과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예수님은 군병들에게 잡히셨다. 이때 베드로는 자기 품속에 있던 칼을 꺼내어 종의 귀를 잘라버린다.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제재하고 그 귀를 다시 붙여 주신다. 그러면 칼에 잘린 귀를 바로 붙일 정도의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왜 순순히 잡혀 가셨는가?’ 라는 문제가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순순히 잡혀 가신 것은 그리스도라는 정체성과 우리의 구원에 있어 아주 절대적인 사건이다. 그런 만큼 당연히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우리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과정, 그것도 죽은 자를 살리고, 칼에 잘린 귀를 붙이며, 금방이라고 하늘의 군사를 불러 자신을 잡으러 온 자들을 물리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죽을 자리로 끌려가신 이유를 모른다면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십자가를 지고 따라갈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참고 가셨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놀라운 능력을 가지신 분이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죽임을 당한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 같지만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 있다면 지지 않기를 바라셨을 뿐 아니라 당장이라도 하늘의 군사들을 불러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십자가를 지신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가는 어떤 힘이 있다는 의미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여기에는 엄청난 착시현상이 있다. 예수님이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지기 싫은 십자가를 사명감과 인내로 지신 그 행동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보는 한정된 시각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십자가에 대한 착시현상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우선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의가 육신이 되었다는 의미고,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의 삶을 이끄는 본성이 된 사람이라는 의미다. 이는 비단 예수님뿐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그 모습이 육신 가진 인생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라는 것을 깨달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모습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의 삶을 주관하고 이끄는 본성이 된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셔서 이루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은 지지 않아도 되는 십자가를 져야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니 말씀이 육신이 될 때 그 육신의 삶은 이미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신 것이다. 이는 마지막 기도에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와 하나이니라 하시니(요 10:30)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십자가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은 이미 예수님 안에 있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 그 자체다. 십자가는 사명감으로 져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수의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으로 표현하는 자리가 십자가다. 십자가를 져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의 육신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십자가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도>에 대한 핵심 중의 핵심이다.


십자가를 져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의 육신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십자가에서 나타나는 것


따라서 이것은 쉬운 말로 운명 같은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 표현으로 본다면 생명의 본성 때문이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 본성이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께서 가지신 군병을 물리칠 능력 이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간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가진 본성이 본질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의인이신 예수님, 충분한 능력이 있지만 본성에 이끌려 죄인이 되는 그리스도라는 존재로 거듭나라는 의미다.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면 의인인데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본성대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은 다른 말로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로 거듭나라는 말씀이다. 


그 그리스도의 본성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사람을 만드실 때 사람에게 계획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존재, 그 생명의 본성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나타내시고자 하신 본성은 바로 하나님의 의와 뜻으로 거듭나서 온전한 의인인데 세상의 가치를 주장하는 자들 앞에 육신의 수고, 심지어 목숨까지 종과 같이 내어 줄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사람의 육신은 그렇게 내어 주라고 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육신을 내어 주신 것과 같이 자기 육신의 삶을 종과 같이 내어 줄 때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계획이며 사람 창조의 목적이다. 


그런데 십자가로 가지 않으면 어떻게 그것이 나타날 수 있겠는가? 의인이지만 죄인의 의 앞에 육신을 내어 주는 일 없이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상을 만드신 법이고 계획이고 목적이며 육신 가진 인생을 행한 뜻이다. 그 뜻이 본성인 생명으로 거듭난 존재가 그리스도며, 그 뜻과 말씀이 육신 곧 육신의 삶이 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순순히 가신 이유를 바로 아는 것은 신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거듭남과 그리스도의 생명, 그 본질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끌고 간 것은 사명감도, 의지도, 군병도 아니다. 본성이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 그것이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갔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예수님을 끌고 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본성이 십자가로 예수님을 끌고 갔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갈 모든 사람 역시 그리스도의 본성이 끌고 간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십자가를 지기 전에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이다.



생명의 본성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더 있다. 성경을 지키고 살아가는 방법, 능력 도 생명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생명의 본성이 아닌데 ‘항상’, ‘범사’, ‘쉬지 말고’와 같은 말씀을 지킬 방법은 없다. 어떤 사람도 신념으로 어떤 것을 항상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생명이면 언제나 그 본성대로 산다. 그래서 거듭난다고 말한다. 성경을 지키는 것은 노력이 아니라 거듭난 생명의 본성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본성대로 살다가 성경을 보면 성경을 지키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생명 본성이 아니면 말씀대로 살 방법이 없다. 거듭난 사람이 아니면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고 그리스도의 본성이 아니면 이 육신의 삶을 십자가로 끌고 가지도 못하고 말씀대로 살게도 못한다. 간헐적으로 의지로 성경을 지킬 수는 있겠지만 항상 지키는 존재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달라서 항상 노력할 뿐’이라고 변명한다.


생명은 태어날 때 가진 본성과 정체성이 죽을 때까지 동일하다.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떠날 수 없다. 생명을 죽일 수는 있어도 정체성을 바꾸진 못한다. 개를 죽일 수는 있어도 고양이로 만들 수는 없는 이치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거듭남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나면 그리스도와 같이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명으로 난 것이 아니면 만 가지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를 범하여 모든 것을 범한 것이 된다. 흔히들 교회에서 말하는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나 기도할 때 회개부터 하는 신앙은 사실 모든 율법과 성경을 범한 삶이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고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다. 그렇게 행동해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났기에 그렇게 사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 ~~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로 거듭나라는 말씀이다. 거듭나서 사는 사람들의 삶의 모양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거듭난 사람에게 성경은 자기 이야기이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지켜야할 율법 혹은 계명이다.


바로 그 그리스도의 본성이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간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이고, 하나님의 의는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므로 모두들 높아지려고 혈안인 된 인생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천군천사를 불러 군사들을 물리치지 않은 것은 참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이 십자가로 간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동일하게 가졌고,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진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는 것은 피하고 싶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니 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이 십자가로 끌고 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겠느냐?”고 하신 것은 생명으로 났는데 그 본성을 어기면 그 생명 정체성이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씀이다. 사람으로 났는데 돼지우리에서 돼지와 함께 벗고 산다면 그를 낳은 아버지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는 말씀이다.


나사렛에서 나고 세리와 창녀들과 같은 죄인들과 먹고 마시던 사람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없다는 사람들의 가치관에서 비롯된 법으로 예수님을 심판하니 예수님은 죄인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은 메시아도,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 속 그리스도라면 높아지고,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권세와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가난한 자는 항상 있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끌고 갔지만 실상은 달랐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인 그리스도의 생명은 그 본성 자체가 낮아지는 존재이므로 군병들이 끌고 가는 자리가 자신의 자리다.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자리로 가는 것인데 사람들이 볼 때는 끌려 가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끌려가신 것은 인류를 구하기 위한 사명감과 사랑 때문에 신념과 의지로 가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는 생각이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기에 그 본성이 이끄는 대로 가신 것이다. 군사들에게,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잡혀 가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자기 본성의 자리로 간 것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가치관 앞에 낮아지는 존재이고 세상 가치의 법이 끌고 가니 그냥 가신 것이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끌려가는 것이 용납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직도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칼로 휘둘러서라도 저항해야 했고, 또 그렇게 해서 지킬 수 없다면 자신으로서는 아직은 함께 동행하기에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즉 제자들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괴리가 제자들에게 혼돈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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