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7장, 막 15장, 눅 23장, 요 18,19장)


예수님을 심문한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하려 했다. 스스로 왕이라는 반역죄를 시인했음에도 석방하려 한 것은 빌라도가 볼 때 이 꼴로 왕이 된다는 것은 어림도 없고, 왕이 되려면 백성들의 지지라도 있어야 할 텐데 자기 백성들도 죽이려고 애쓰는 예수가 자기 눈에 반역자로 보일 리 없었다. 이로 볼 때 이방인인 빌라도가 볼 때도 보잘 것 없는 예수를 유대인들이 하나님 아들로 인정한다는 것은 정말로 말이 안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빌라도는 유대 땅을 로마 황제를 대신하여 다스리는 총독이다. 왕을 대신하는 자다. 한 마디로 이긴 자의 상징과 같은 사람이다. 그가 볼 때 이렇게 완전한 패자가 왕이 되어 피라미드 위로 갈 방법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스스로 왕이라고 말했으나 그가 볼 때 예수님은 몇 대 때려서 보내는 것이 합당해 보였다. 그러나 총독이 민란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유대인들은 완강했다. 


빌라도는 하는 수 없이 명절이 되면 죄수 하나를 석방해 주는 관례에 따라 예수님과 당시 성중에서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을 저지른 바라바라는 죄인과 둘 중에 하나를 석방해주려 했는데 백성들은 바라바를 선택했다. 이에 대하여 빌라도는 매우 놀랐다. 그러나 약속대로 바라바는 내어주고 예수님은 사형을 선고하면서 자신은 이 일과 무관하기를 바랐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바라바를 선택했을까? 예수님이 자신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은 있지만 그 사이에 많은 이들의 병도 고치고 권위 있는 말씀과 기적을 보여주셨는데 그런 예수님은 버리고 오히려 직접적으로 자신들에게 해를 가하고 살인한 강도인 바라바를 선택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일반적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유대인들의 선택은 그리스도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와 그리스도의 직임이 무엇인지를 기준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매불망 기다리는 메시아는 나라의 독립을 이끌 메시아다. 육신과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를 하나님께서 보내실 것이라 믿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유대인들의 기대를 일갈했다. 육신의 문제 해결을 하지 않겠다는 예수를 구해야 할 이유가 유대인들에게는 없어진 것이다.


예수님이 아닌 바라바를 선택한 그들의 선택 기준은 그리스도였다. 누가 더 메시아적인 기대를 충족할 수 있는지가 기준이었다. 일반적으로 바라바를 강도로만 알지만 마가복음에서는 ‘민란을 꾸미고…’라는 말에서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민란이라는 것은 단독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란에는 동참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식민국가에서의 민란이라는 것은 다분히 독립에 관한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다소 이해하기 힘들어 보이긴 해도 예수님보다 바라바를 선택하는 기준이었다.


결국 독립과 육신의 평안이라는 눈에 보이는 구원, 나타난 세계인 현실 세계의 구원을 바라는 이들이 육신의 방법으로 바라는 바를 이루려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성경 속에 있는 유대인들의 엄청난 잘못만으로 보면 안 된다. 지금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기도하는 것들도 육신의 문제, 사회의 문제들이고, 그 기도를 이루기 위해 기도하는 행위, 성경대로 살기 위한 육신의 노력, 그런 노력의 일환이라 착각하고 있는 헌금, 성경읽기/쓰기, 교회 봉사와 같은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육신의 방법이고 그 육신의 행위를 축적한 공로를 가지고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께 구하는 장사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예수님이 아닌 바라바를 선택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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