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로 산다는 것,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를 닮고 따라가는 삶이라고도 말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난 사람들의 모든 삶이다. 산다는 것은 생명으로 난 사람들의 시간과 경험과 표현이다. 생명으로 나지 않은 것들의 세월은 그냥 가동이나 사용에 불과하다. 핵심은 난다는 것이다. 성경이 괜한 이유로 거듭남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어떤 생명이든 태어날 때 그 생명의 유전적인 모든 것은 온전하게 난다는 것이다. 태어난 다음에 유전자가 더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태어났을 때 온전하지 못하다가 자라면서 온전해지는 것이 생명의 정체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아이로 나서 어른이 되는 것과 다르다. 아무리 어려도 사람은 날 때 이미 사람으로 온전한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법이기 때문에 성경은 그리스도로 나는 것을 거듭난다고 하고 생명의 법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은 거듭날 때 이미 온전한 그리스도로 나야 하는 것이지 교회에 다니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스도로 난다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이 생명으로 살았다고 여기는 본성을 온전하게 가지고 나는 것이지, 교회에 다니면서 성경대로 사는 경건의 노력을 더했더니 더 온전한 그리스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리스도로 난다는 것은 성경의 모든 말씀이 자신의 이야기가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것을 믿느냐의 문제다. 당연하게도 그리스도로 난 사람이 아니면 믿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사실 심각한 신앙적 도전을 던지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믿으니 구원을 받고 죽어서 천국 간다는 말에 심취하여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지 않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아들이 되기를 바라시면서 주신 성경이 모두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고, 성경은 하나님 아들에 대한 증거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겠다거나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성경이 자기 삶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성경이 삶의 매뉴얼이나 지침이나 경전이 아니라 자신의 일기가 된다는 의미다. 그리스도로 난 생명에게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 설명하는 말씀이 일기와 같은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5:39)

 

문제는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삶이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와 같은 말씀들이 그렇다. 이러한 말씀들을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이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이 문제다. 그런 것은 예수님이나 가능하지 자신은 가능하지 않다고 믿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그런 것을 다 지키면서 사는 사람이 있느냐?”는 반문을 필연적으로 대하게 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반문과 동일한 질문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예수님께 늘 시비를 걸던 유대인들이다. 예수님께서 내가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느니라.” 했을 때 웃기시네, 네 나이가 몇 인데 아브라함보다 먼저라는 거냐?” 반문하고 죽이려했던 것과 대화의 구조가 동일하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으면 항상 기뻐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 당시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 먼저라고 하신 말씀에 육신의 나이로 볼 때 완전 웃기는 소리였던 것과 같다. 불가능한 소리라고 치부한다는 점이 같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8:56-59)

 

유대인들에게 보이는 예수님은 육신뿐이었다. 당연히 그들 눈에 보이는 육신은 자신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육신이었다. 사력을 다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신들의 육신이나 예수님이나 같은 육신으로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형상으로서 육신은 같지만 그 존재 목적은 전혀 다른 예수님이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볼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보다 먼저였다고 하신 것은 집보다는 설계가 먼저였다는 말이다. 아브라함 아니라 모든 인생들은 그 존재하는 목적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되는 것이므로 어떤 인생도 예수님보다 먼저일 수는 없는 것이지만 자기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잉태한 생명이 없으므로 그것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와 동일하게 오늘날 사람들도 어떻게 사람이 항상 기뻐할 수 있느냐?”며 반문하는 것 역시 그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원이 없고 거듭난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지 않고 높아지려다 실패하는 자신을 기준으로 삼고서 성경을 보기 때문이지 사람이 항상 기뻐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들이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잔을 옮겨 주십사 피땀 흘려 기도하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실 정도로 평안하셨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도 주장해야 하지만 그럴 때는 또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성경을 지키려고 그렇게 노력하지만 정작 누군가가 성경이 자신의 이야기가 되었다고 하고, 성경의 모든 말씀이 자기 안에 이루어졌다고 하면 일언지하에 믿지 않는다. 자신들이 그렇게 죽자고 노력하는 것을 누군가 이루었다면 정말 반갑게 맞아 그 말을 들어야 할 텐데, 그렇게 듣고 판단해도 될 것인데 듣지도 않고 그것을 조롱하고 비판한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들의 노력은 부질없는 것이라고 시인하는 것이다. 그렇게 지키려는 성경은 지킬 수 없는 것이라고 시인하는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자신과 같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일 뿐이다. 성경을 다 지킬 수는 없다는 사람은 유대인들이 그랬듯 육신을 가진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사는 존재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 자기 본심이지만 교회에 다니니까, 또 죽어서 천국에 가야 하니까 거짓과 빈말로 예수님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그렇게 된다고 말하는 외식주의자일 뿐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거짓말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도,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도, 그리스도인도 거듭난 사람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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