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 구원과 율법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9. 28. 04:00 Writer : 김홍덕


율법에 대한 가장 초보적인 생각은 구약은 율법, 신약은 복음, 십계명과 유대인의 법은 율법,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교훈은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키는 기준과 법이 무엇 이냐에 따라 율법과 복음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지켜서 의로워진다고 생각하면 율법이다. “주기도문 100번 쓰라.” 율법이다. 손해를 입어 속상한데 “범사에 감사하라”하셨으니 감사헌 금을 낸다? 율법이다. 종과 같은 마음이 없는데 수련회 프로그램에 있어 발을 씻긴다? 율법이다.


이와 같이 흔히들 복음적인 신앙생활이라고 여기는 대부분의 신앙생활이 율법적인 신앙이다. 어떤 행위가 자신을 하나님 앞에 의롭게 한다고 여겨 행하는 것,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무엇을 행하는 것, 구원 받은 사람의 의무라며 마음에 없지만 의무적으로 하는 것은 그 행하는 규범이 신약성경에 있어도 다 율법이다. 이와 같이 율법적인 신앙의 모습은 당연히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모습이다.


반면에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존재 자체가 의롭기 때문에 행위로 의로워지려 하지 않는다. 성경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살다 문득 문득 성경을 보면 그것이 자기 삶임을 발견하는 것이 거듭난 삶이다. 이런 삶에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노력이 필요할 리 없다. 거듭나 생명이 가진 본성이 삶을 이끌 뿐이다. 그 생명이 그리스도의 생명이니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말씀하신 성경은 말 그대로 그 삶의 이야기가 된다.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이 완전히 '아멘'되어야 비로소 거듭난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다.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율법에 대한 기준이 신약이냐, 구약이 냐도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이냐, 예수님 오시기 전의 말씀이냐도 아니다. 기준은 무엇이라도 그것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이나 신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을 목적으로 행하면 어느 것이라도 율법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구분이다. 구약성경은 율법이고 신약성경은 복음이 아니라, 구약이든 신약이든, 십계명이든 예수님의 말씀이든 그것이 무엇이라도 지켜내면 의롭고 선하며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하면 율법이 된다. 바로 그 자리. 그 가치관을 떠나는 것이 구원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신구약 따지지 않고 성경 어디에나 다 그 모습이 있다.


더 나아가서 법이 신약성경에 있느냐 구약성경에 있느냐 불경에 있느냐 몰몬경에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예수님의 말씀도 예수님과 동일한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행하고 지키며 살려고 노력하면 율법이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 '세상은 이렇게 사는 것',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야 인간다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다 율법이다. 그가 만든 세상이 아니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이 율법이고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다.


계명이든 예수님의 말씀이든 그것이 무엇이라도 지켜내면 의롭고 선하며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율법


이런 모든 율법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다. 늑대가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는 것이나, 예수님의 말씀 대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율법으로 의로워질 수도 구원을 얻을 수도 없다는 말씀이 이 의미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본성, 안목, 가치관이 달라진 것이 없고, 이전에 좋던것 지금도 좋은데 그것을 참고 견디는 힘을 “이제 예수 믿으니까 참자”, “구원받은 사람이 그러면 되겠나”, “이것을 이겨야 천국 가서 잘 살지”와 같은 이유에서 얻어서 견디려고 한다고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렇게 참고 견디는 그것이 바로 율법적인 신앙이다. 구원이 없는 삶이란 말이다.


반대로 양은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성경을 지키며 살려고 하지 않는다. “구원받았으니 ~하자”라고 다짐하지도 않는다. 거듭났으니, 그 새로운 생명으로 그냥 사는 것이 구원받은 자로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살다가 성경을 보면 이상하게 자기 삶이 성경에 다 있음에 놀라고 감사한다. 그것이 바로 거듭난 생명이고, 말씀대로 사는 삶이다. 그렇게 된 것이 구원이다.


따라서 삶이 이와 같지 않다면 당연히 거듭나지 않은 것이다. 당연히 구원받은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유일한 신이라는 것과 동일하게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신학과 같은 것으로 교묘하게 사람들을 속일 것도 아니며,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니 노력하는 것이라고 하는 궤변 같은 것으로 가릴 수 없다. 그런 모든 것은 무화과잎으로 만든 아담의 옷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삶을 생각해보면 더 명확하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고 따라가는 삶을 사는 사람들 아닌가?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려고 하신 적이 없다. 유대인들의 기준으로 보면 어긴 적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냥 이 땅에 오셔서 사셨을 뿐이다. 그런데 율법의 완성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이를 확증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육신의 삶이 말씀과 같다는 것이다. 이같이 육신의 삶이 말씀 그 자체인 것 이상으로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법은 없다. 신약성경은 멀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께서 사신 삶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에 그 말씀의 본성대로, 그 생명의 본능대로 사신 것을 보이고 기록했더니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된 것이다. 육신이 된 말씀이 십자가로 데려갔고, 또 하나님의 본체시니 하나님의 품 안으로, 하나님의 의 안으로 가시니 승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전의 자리에서 떠나 향해가는 구원의 자리는 너무 분명하다. 성경을 잘 지키려고 공부하고 노력할하고 있는 자리에서 떠나야 한다. 그것은 구원 받은 삶이 아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본성과 안목과 가치관이 바뀌지도 않았는데 입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것 역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구분하고 구원을 받았는지 알고 싶다면 자신이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리에서 그 이전과 세상을 보는 안목이 달라 졌는지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면 알 수 있다. 구원받기 전이나 받은 다음이나 추구하는 것, 귀한 것이 같고, 바라는 것 같은데 그것을 예수님을 의지해서 간구하고 의지한다고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게 외식이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눅 6:46)


자신의 상태를 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지 보면 된다. 또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와 가족들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구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 정체성과 삶의 목적과 의미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모든 세상 사람들이 사랑하고 구하는 성공과 위대해지고 영광스러워지는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하나님께 얻으려고 하는지 정도는 충분히 구분할 수 있다. 양심만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인생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알게 해 주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을 바라는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평안해지기를 구하는지도 얼마든지 구분할 수 있다. 역시 양심만 있으면.


하지만 사람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율법대로 살아낸 공로를 드리려 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창조하시고 삶을 주신 목적을 알아 그대로 사는 것을 구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성경을 지키며 살려고 노력한 자신의 삶을 드리려 한다. 노력한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율법인데 그것조차 모른다. 이런 어리석음의 반복이 계속된다. 이것이 매번 노력하고, 실패해서 회개하고 다시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반복되는 이유다. 노력하라고 주신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자기 심령에 순종하여 거듭나기만 하면 되는 <생명>의 세계를 노력으로 일갈하려니 겪는 무한히 수고를 반복하는 인생이 된 이유다.


하지만 거듭난 사람은 존재를 드렸기에 자신이 살아가는 것외에 하나님과 상의할 것이 없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삶을 주신 하나님 뜻의 근본을 아는데 다른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야 기뻐하실지 생각지 않는다. 이미 자기 삶을 드렸으니 행여 드리려 해도 남은 것이 없다. 이런 삶이 거듭난 사람의 삶이다. 여기에 비추어 자신을 보면 거듭난 삶인지 아닌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거듭나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므로 생명의 법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나는 것이 거듭남이니 하나님의 법으로 나야 한다. 하나님의 법은 존재의 법이다. “나는 누구입니다”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그래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므로 구원에 이른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10)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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