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3:18-25 주께 하듯 사는 삶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2. 18. 09:16 Writer : 김홍덕

신앙생활의 근본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내용과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형식에 관한 말씀이다. 이 육신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으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 곧 이미지대로 만드셨다고 했는데 그것은 이 육신이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표현할 형식으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생의 본질이시고, 인생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삶을 살게 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한 것도 이것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여기서 말씀은 LOGOS : 계획, 계산)이 육신이 되어 나타나셨다는 것이다.(이렇게 나타나신 말씀을 '뤠마'라고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와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육신을 가진 사람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한 표준이라는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에 대한 표준을 보이셨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육신으로 이 땅에서 사는 모든 사람의 운명이 그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에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육신으로 만드신 이유인 것이고, 예수님과 같이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세계가 열려서 그러한 가치관으로 새롭게 살게 되는 시작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태초이고, 그것이 거듭남이고 그것이 구원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세우신 모든 의는 다 육신을 주신 것과 절대적인 관련성이 있는 것이다. 즉 이 육신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흑암이고 어두운 맹인이며,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사망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면 생각을 해 보자.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시고 그 육신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이라는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게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육신으로 만드신 뜻의 일부라는 의미인 것이다. 세상은 죄악 되고 이 죄악 된 세상에 사는 우리는 곤고하므로 이 죄악 많은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인생의 본질과 내용과 의미와 목적이 되고, 그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육신의 삶이 그것을 잘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표현하면서 살아갈 때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사람이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 바로 성령의 감동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삶은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알게 되듯 그 신앙의 삶을 보고 감동을 받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고 하나님의 생명이 전해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러한 현상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거나 잘못 믿고 있는 것이라는 방증이 된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삶이 전도의 감동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내가 전하는 성경 말씀이 사실인 것을 믿어라.'고 하는 것이 전도가 아닌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신앙생활의 표준인 십자가



그렇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라는 인생의 본질이 내용인 삶을 사셨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고, 이 법 외에 하나님께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이름을 주신 것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증거로,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것이나,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 그 증거라고 한다. 또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다시 살아나신 기적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라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증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든 기적은 십자가에서는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다시 사신 것은 기적이 목적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보이신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는 생명의 증거이기 때문에 살리심으로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살리시고 어떤 것을 죽은 것으로 보시는지를 보이신 것이지 기적이 목적은 아니다. 


그러니까 죽은 자 가운에서 살아나는 기적 때문에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정체성은 죽을 수 없고, 하나님 앞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기에 살아나신 기적으로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즉 기적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것이 어떤 생명이신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발견하게 한 예수님의 모습은 물 위를 걸으신 모습이나 죽은 자를 살리신 모습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으로 인한 것이다.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들을 보고, 또 자신들도 그런 기적을 일으켰던 제자들도 그런 일을 봤음에도 잡혀가는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고 도망을 갔다. 잡혀가는 예수님은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즉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를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십자가의 도는 정말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다. 이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욕한다고 죽임을 당한 형틀이다. 그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욕한다고 죽어가는 데도 그 많던 기적도, 또 그를 호산나 환호하던 사람들 중에 어떤 이도, 그뿐 아니라 3년간 '주님!'이라며 따르던 제자들도 구해주지도 변론해주지도 않는 자리였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손과 발에는 못이 그리고 옆구리에는 창에 찔리는 벌거벗은 모습으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높이 달린 그런 모습일 뿐이었다.


바로 그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고, 바로 그 모습이 사람의 정체성이고, 그 모습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십자가의 도가 육신이 그렇게 비참하고 또 이 시대로 보면 가난하고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을 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는 그런 말초적인 것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십자가의 도를 통해 보여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형상, 사람의 정체성,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은, 자신의 생각(가시관)으로나 자신의 행위(손과 발이 못 박히심)나, 자신의 신분(벌거벗겨짐)과 같은 것으로는 세상의 법으로 인하여 죄인이 되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오히려 그것에 털 깎는 자 앞의 어린양과 같이 묵묵히 죽임을 당하는 그런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가진 재물이나 공로 뿐 아니라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 위에 서서 심판하고 대항하고 이기려 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바로 이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이 시대의 신앙인들이 세상으로도 비난 받고, 무엇보다 스스로도 신앙으로 인한 행복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참 비참해 보인다. 어떻게 사람이 자신이 더 의로운데 그것을 버리고 늘 죄인이 되어 곤고하고 환난을 당하면서 참고 살 수 있겠나 싶은 것이다. 이건 누구라도 다 그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필자 역시 그런 생각을 떨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 본다면 그런 염려를 한다는 것은 그런 삶을 살아보지 못했다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십자가의 도는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을 다 버리고 어떤 안락함이나 육신의 평안도 없이 고행하는 것이 신앙처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일부러 고생을 사서 하는 수도원이나 금욕적인 삶을 사는 괜한 곤고함에 자신을 던지는 사람들이 어느 종교에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도의 자리에서 살아보지 못한 사람이라는 증거일 뿐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보면 어리석은 일이다.


그뿐 아니라 이 십자가의 도를 알지 못하면 세상을 무조건 등지고 거리를 두려하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육신의 부모를 통하여 이 땅에 들어오게 하신 것이 부모가 삶의 목적을 주는 것이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등지고 나와서 신앙 공동체에 속하여 살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이것은 물론 획일적인 상황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경우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수도 있을 수 있다.)


물론 그런 것은 좀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알고 보면 그것과 궤를 같이하는 신앙의 모습은 의외로 많다. 즉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의 각종 사회 속에 또 관계 속에 살면서 그들이 신앙과 무관하고 하나님의 의와 반대방향으로 삶을 요구하는 것 앞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겉모습이야 어떠하든 속으로는 그것을 정죄하고 심판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돈 타령만 하는 직장 상사가 성과를 위해서 교회 가는 것을 제재하는 상황에 직면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짓이란?' 과 같은 표현들을 한다는 것이다. 즉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상전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이것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신앙생활의 방점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의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존재보다 존귀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 존귀함은 세상 사람들에게 의인으로서 죄인이 되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지 존경받고 심판하는 자리에 두시기 위함은 아니다. 존귀한 이유가 바로 사람을 구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기적과 같이 남이 가지지 못한 어떤 재능이나 재물이나 지위나 공손함이나 그 어떤 것으로도 그것이 없는 사람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죄인 취급하거나 심판한다면 십자가의 도를 아는 것이라 할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더 섬기고 종이 되고, 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주장 앞에서 죄인이 되는 삶의 모습이 자기 안에서 나올 수 있어야 십자가의 도를 아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보이신 삶을 본받고 십자가를 지고서 따라가는 삶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죽어야 사는 십자가의 도



아내나 남편, 아비나 자녀, 상관과 종과 같은 관계 뿐 아니라 어떤 사람과의 만남과 관계에 있어 발생하는 모든 갈등과 마찰은 어떤 것에 관해서든 우위에 있는 사람이 낮아지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관해서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을 아노라 하면서 사람들이 그것을 몰라준다고, 아니면 몰라서 하는 것을 고치려 하고 가르치려 하고 심지어 심판하려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인해서 모든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 들어와서 그것이 죽어야 생명이 된다는 것이다. 즉 씨와 갗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는 것은 그 말씀으로 드러내고 아는 것으로 사람을 심판하고 다스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자기 안에서 죽어 없어져야 생명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에 관해서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아는 사람을 두신 하나님의 목적은 그것을 가졌다는 것을 드러내고 나타내고 그것으로 영광을 얻으라는 것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없는 사람을 서기라는 말씀인 것이다. 즉 수학선생님이 수학을 배우는 아이들 앞에서 수학을 잘 하는 것을 자랑하고 못하는 학생을 심판하는 것이 수학 선생의 정체성이 아니라 수학을 잘 모르는 학생들을 위해서 수학에 관해서 종이 되고 모르는 아이들을 섬기는 것을 위하여 자신이 아는 수학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권세를 이용해서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멸하시고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의를 가진 아들이지만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전하는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아는 것으로 사람을 심판하셨다면 제자들은 다 심판을 받아 예수님에게서 떠났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이 십자가의 도와 비밀을 모르면 사람을 버리는 것이다. 교회가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고 교리를 지키고 성경을 지킨다는 이유로 사람을 심판하고 배척하고 떠나기를 바라고 실제로 떠나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의 도를 하나도 모르는 것이다. 교회가 아무리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바로 알고 있어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으로 인해서 교리가 손상을 당하여 오히려 죄인이 될 때 비로소 교회가 온전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바로 이런 십자가의 도가 모든 사람의 관계에 있어야 함을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기 때문이고, 이것이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의 삶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십자가의 도가 자신의 생명이 된 사람은 부부, 부모와 자녀, 상관과 종과 같은 인간관계는 물론 사회 안에서 어떤 자리에서도 십자가의 도와 같이 자신이 가진 것으로 가지지 않은 이를 위하여 수고하고 죄인이 되는 사랑을 표현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리스도의 삶을 보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에서 한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7-11)


이 비유는 누구나 아는 비유이다. 그런데 이 비유 앞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을 두고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고 반문하는 상황에 이어지는 말씀이라는 것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대한 규례를 알고 있었는데, 자신들이 그것을 알고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지키는 것이 그것을 어기고 사람을 구하는 것 보다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주장한 것이다. 즉 가진 것으로 죄인 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것을 어기면서까지 수고하는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즉 잔치에서 상석에 가서 앉은 것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더 가지게 하신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또한 어떤 규례와 율법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교리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버리는 것은 잔치의 상석에 앉는 것과 같은 것이기도 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교회라는 것을 주신 목적을 모르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말씀하시는 비유이기도 하고, 또한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생활지침처럼 말씀하시는 이야기의 본질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란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을 대할 때 주께 하듯 하는 삶인 것이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제대로 대접하는 것은 그 상대의 격에 맞게 하는 것이기에 십자가의 도를 보이신 예수님께 하듯 하는 것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보이신 십자가의 도로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예수님께 맞는 격에 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바로 그렇게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