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3:18-25 생활지침의 본질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2. 20. 12:05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가 골로새서를 기록한 이유는 바울 사도에게 말씀을 듣고 그 말씀으로 교회를 세운 에바브라가 골로새교회에 세상의 철학과 과학과 같은 것에 능통한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서 그런 지식이 있는 사람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온전히 전하는 에바브라에 비하여 더 인정을 받는 문제로 인함이었다.


이는 에바브라가 속된 말로 자기 밥그릇이 빼앗겨서 바울에게 고자질하러 갔다는 것이 아니라, 에바브라가 볼 때 그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 곧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교회의 정체성이 변질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에바브라는 적어도 그런 것이 복음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은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에바브라의 말을 따를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주제에 가정생활의 지침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들을 함께 한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단순한 부록인가? 그건 그렇지 않다. 요한복음 마지막에 이르기를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록하려 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부족하다고 하셨는데 불요한 말씀을 성경으로 우리에게 주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즉 바울 사도가 어떻게 보면 가족이나 사회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지침을 주었다는 것은 분명히 철학과 과학과 같은 것이 신앙에 가미되는 것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세계는 생명의 세계이다. 생명의 세계라는 것은 어떤 생명이라도 그 생명으로 나기만 하면 그 생명이 가진 유전자와 본능이 표현되는데 그것을 막을 방법은 세상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개를 죽일 수는 있어도 개를 고양이처럼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철학과 과학과 같은 세상의 초등학문이 신앙에 더해지면 더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생활지침(?)의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것이다. 콩 심은데 콩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에 있어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세상의 의를 혼합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문제이다. 많은 구약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늘 하나님을 떠났다고 책망을 받았는데 그 내용의 상당 부분에는 성전에 우상을 두었다는 내용으로 책망을 받는다. 즉 하나님의 성전 안에 우상을 두었다는 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악한 것이라는 것이다.


선지자 미가는 이런 말씀을 했다.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뇨 사마리아가 아니뇨……(미 1:5)

사마리아는 앗수르가 침공한 후 혼혈 정책을 펼쳐서 앗수르인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은 혼인을 하게 함으로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과 다른 종족으로 취급한 북쪽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다. 즉 피가 섞인 사마리아와 같이 하나님의 의와 이방과 같은 세상의 지식이나 신앙이 더해지는 것이 바로 구약성경 내내 이스라엘이 책망을 받은 이유였다.


이것은 노아홍수가 발생한 근본 원인이기도 했는데, 홍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고 그 사이에서 위대함이라는 네피림이라는 종족이 태어남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야할 인생들이 형식의 아름다움에 매몰되어 인생의 내용이자 본질인 하나님의 의는 버리고 형식이라는 육신만 남음을 보시고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하시며 그런 존재들을 다 쓸어버리시기로 하신 것이 바로 노아 홍수의 원인이었다.


그와 같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과 사람의 갈등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발생한 것 보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사람의 생각을 더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사실 알고 보면 이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뿌리이기도 하다. 사람이 자신이 어떤 물건을 샀다고 하자. 그 물건의 기능이 자신을 만족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믿는다면 구매할 당시의 모습 그대로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뭔가를 바꾸고 수정한다는 것은 그것이 자기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것을 만든 사람이 자신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킬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의 정체성이나, 또한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 인생이 가진 그 자체가 하나님을 믿는 것에 부족함이 없고, 또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을 신앙에 더하지 않는 것에 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과 세상에서 비롯된 것을 그 만드신 이를 믿는 신앙에 더한다는 것은 개가 자신이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에게 자신이 전한 복음 곧 예수가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그 자체로 믿는 것 이외에 세상에서 비롯된 철학이나 과학을 더하는 것은 개가 자신이 토한 것을 먹는 것과 같은 것임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이나 과학이나 사람이 만든 모든 경제적 도덕적 가치라는 것은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고, 그 모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게 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인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을 자신의 정체성의 갈증과 배고픔을 해결하는 음식으로 먹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온 말씀과, 하늘의 물을 먹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배고픔과 갈증을 해결하는 존재이고, 하나님의 의와 내용을 자신의 본질과 내용으로 삼는 질그릇과 같은 존재이지 자신이 세상에서 살면서 내어 놓은 것을 자신의 정체성을 해갈하는 음식과 내용과 본질로 삼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모든 갈등이다. 사람이 자신이 선악 간에 판단하고서 자신이 생각할 때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야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선악과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선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이외에 사람이 생각할 때 하나님과 같이 되려면 이런 저런 것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이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골로새교회의 문제이자 현안 역시 바로 그런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구약성경의 구조로 본다면 타락한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전에 우상을 가져다 놓은 것과 같은 것이고, 바울 사도는 선지자와 같이 그것을 책망하고 바로잡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 삶



그리고 그러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은 결국 사람의 삶이 모두 문제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그런 본성, 곧 하나님과 사람의 것을 더해야 위대한 신앙이 된다고 생각하여 복음에 철학과 과학을 더하는 그런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은 남편을 공경하지도 않고 아내를 사랑하지도 않으며, 아비와 자녀, 종과 상전이라는 모든 관계에 있어 다 잘못된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설사 행동이 아주 도덕적이고 선할지라도 그것은 간첩의 선행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 가장 본질은 그 사람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깨닫도록 위하여 수고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으면 소리 나는 꽹과리와 같은 것일 뿐 아니라 설사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 해도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 있다. 하지만 사람은 슬플 때도 있는 아니 아주 많은 존재이다. 그런데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존재가 되라는 말인가 싶어서 이런 저런 해석을 내 놓지만 그 말씀은 기뻐하는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에게 일어나는 희노애락에 감사하고 그런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이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자신이 같은 육신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나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나 그 어떤 사람 관계 안에서의 모습 안에서도 자신이 인생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억지고 참고 하는 사랑의 모습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이 의미 있어지는 그런 사랑이 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사랑에 목적이 따로 있는 것이다. 자신의 본성은 그렇지 않은데 꾹 참고 견딘 다음에 천국에 가서 보자는 식의 신념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믿음도 사랑도 아니다.


그런 사람의 모습은 다 거짓된 것이다. 자신의 본성에는 없는 것인데 성경에 나오는 것을 지켜 행하면 그 본성을 가진 존재와 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초등학문적인 발상일 뿐이다. 이것이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믿음의 본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은 다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 안에 사랑할 수 있는 본성이 없으면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차라리 낫다. 솔직하기라도 한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시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속이는 것은 자신 안에 있는 본성은 죄악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행동은 그렇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진 문제는 먼저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악하다고 여기는 사람 안에 있는 본성을 주신 분이고, 그런 본성으로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것을 무시하는 것이라는데 있다.


바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 뭔가가 더해지면 더 좋은 신앙이 된다고 생각하고 신앙에 과학이나 철학이나 재물이나 고상함을 더하지만 그런 것들은 다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그것을 사람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신앙으로 흡수하는 것은 개가 토한 것을 먹는 것과 같은 꼴이 되는 것이고, 그런 것으로 아무리 삶을 치장하고 신앙에 그것을 더해서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쳐도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죄만 더 가중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본질과 정체성의 내용으로 주신 하나님의 의를 무시하고 자신이 정한 선한 기준으로 사람의 정체성을 삼으려 하는 것이고, 골로새 교회의 사람들은 신앙에 철학과 과학과 같은 것을 더하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 주신 것을 가감하지 않는 것에 있고, 하나님께서 주신 이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바로 골로새서에서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삶의 지침에 관한 말씀인 것이다.


이는 언뜻 생각하면 사람이 자신 안에 있는 것을 악하다 여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도구로서 그런 것을 두셨다는 것을 아는 것과 아내를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어떤 상관이 있겠는가 하겠지만,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위의 것을 생각하고 아는 것이다.


사람이 연약하고, 사람이라는 존재가 원래 내용이 없는 빈 그릇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그렇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사람의 본질이고 내용인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자신에게 그 의를 전해준 부모와 같은 사람을 당연히 그 의(義)안에서 공경할 것이고, 자신으로 하여금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남편과 같은 역할을 감당하는 이에게 복종할 것이며, 또한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낳은 아들과 아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 삶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 또한 그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정체성과 살아가는 목적이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지 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권능과 지위와 능력을 가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보여주시는 모든 권능과 능력과 지위는 오직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이 표현되는 것 그것이 전부이고 모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옷 입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과 본질이 하나님의 의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남편이고 또한 부모이고 진정한 상전임을 아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가진 육신의 삶의 모든 것에 대한 의미를 분명하게 아는 사람이고, 정체성을 안다는 것은 그 생명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이기에 그 생명의 본성으로 비롯된 삶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그러니까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생활 지침이고 그 본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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