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1장 7-12절에는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형제들을 위한 중보기도가 이어지고 있다. 먼저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신령한 지혜와 총명이 가득 채워지기를 바라고 다음으로 ‘주께 합당하게 행하고 범사에 기쁘시게 하시고’라고 하고 있다. 기쁨이란 참 좋은 것이다. 그런데 과연 사람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을까? 살면서 겪게 되는 감사하기 어려운 일들이 어디 한 두 가지일까? 그런데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을까?


사람이 기뻐하는 일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 즉 자기에게 합당한 일에 기뻐하는 법이다.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성공적으로 발사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기쁘지 않다. 우리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야구를 좋아한다. 작년에는 향토 팀인 삼성 라이온즈가 우승을 해서 기뻤다. 하지만 다 그랬겠는가? 그 일이 자기에게 기뻐할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멀리 볼 것 없이 같이 사는 아내는 그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고향도 같은데 말이다. 그렇듯 우리가 어떤 일에 감사하게 되는 것은 그 일이 나와 상관이 있어서 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쁨 역시 당연히 하나님과 상관이 있는 일에 기뻐하실 것이다. 당연히 바울 사도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니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것으로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을 기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전혀 기뻐하시지 않은 일과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형제들과 무관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시고 기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신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주께 합당하게 행하고’라고 먼저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합당하는 것은,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고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합당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사람,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아들이 되었을 때 합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과 어떤 관계, 곧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인생인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실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사람 역시 기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감사할 것도 없는 것이다.


주께 합당히 행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수성 페인트를 기름에 녹이면 사용할 수 없듯이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정체성에 맞는 마음으로 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존재의 신이시니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히 행한다는 것은 존재의 신 앞에 행할 바를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행위나 소유에 무관심하신 분이 아니다. 그 분은 모든 것 되시는 분이시기에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그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목적이 존재로서 만나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아담이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 오셔서 하신 말씀이 “네가 무슨 짓을 하였느냐?”가 아니었다. 또 하나님은 숨어 있는 아담을 찾아 와서는 굳이 장소에 관하여 어디 있느냐 물으심도 아니다. 이는 “너의 정체성의 자리가 어디냐?” 라고 물으심이다.


죄(罪)의 어원은 하말티아(hamaltia)인데 이는 과녁을 벗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즉 ‘죄’라는 것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는 그것을 죄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당연히 죄 가운데 있다면 어떤 경우라도 기쁠 수가 없을 것이다. 


주께 합당하다는 것은 주님의 정체성에 맞는 자리에서 범사에 기쁘게 하시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저 사람의 기쁨을 위하여 육신의 소원이나 들어주시는 산신령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생에게 정한 자리에 합당하게 있음이 기쁨이 되기를 바울 사도가 간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죄에서 구원을 받은 자리이다.


사람의 하나님께 합당하게 되는 자리는 위대함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로부터 모든 성경에서 인간이 자신을 강하게 하고 능하게 하여 하나님께 다가가는 모든 것을 벌하셨다. 바벨탑을 쌓을 때도 흙을 구워서 탑을 쌓았다고 했다. 흙은 인생이니 인생을 강하게 하면 사람이 하늘에 닿을 것이라며 쌓았던 것이 바벨탑이었듯, 오늘날 시험을 잘 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 하는 것이나,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가르치고 믿는 모든 것이 다 시날 광야에서 바벨탑을 쌓던 그 모습과 같은 것이다.


솔직히 사람은 모든 일생의 범사에 감사하거나 기뻐하기 힘들다. 적어도 인생의 목적과 의를 소유와 능력(행함)에 둔다면 죽는 날까지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 앞에 육신의 어떤 것도 자기 맘대로 할 수 없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자기의 정체성이 철저히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고, 육신의 연약함 가운데 사랑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께 수고로 영광을 돌리는 종이 아니라, 존재로 기쁘게 하는 아들이 되는 세계 안에서의 삶에는 모든 것이 감사함으로 밖에 받을 수 없는 운명 같은 본성이 있다.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기도했듯이 우리 또한 그 기도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하나님께 합당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께 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이루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체성을 어떻게 표현하며 살 것인가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인생이 될 때 바울 사도의 기도가 이루어져서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성도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의외로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데 뭐가 그리 필요한가? 그저 태어나기만 해도 그렇게 좋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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