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형제들을 위하여 간구를 한다고 했다. 그 간구의 내용이 9절에서 12절에 이르기까지 기록되어 있다. 먼저는 너희 안에 있는 지혜와 총명이 하나님의 뜻으로 충만하여 지기를 간구했고, 다음으로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라고 되어 있다. 이는 당연히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는 말씀이다.


주께 합당히 행한다는 것은 뜻이 좀 포괄적이라 영어 성경을 한번 참조해 보면,  you may live a life worthy of the Lord 라고 되어 있다. 아마 그 뜻은 ‘주님의 생명을 가치 있게 여기며 살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치 있게 여기는 삶, 또한 주님에게 가치를 둔 삶을 사는 것이 합당히 행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은 범사에, 즉 모든 일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이다.


인생이 어떻게 모든 일에 주를 기쁘시게 살 수 있을까? 만약에 이런 의문이 든다면, 왜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의 뿌리는 나의 업적과 소유를 바침이 주를 기쁘시게 한다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늘 수고해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려 하는데 사람이 그럴 수 있는가? 어떤 날은 좀 눕고 싶고, 또 어떤 날은 신이 나서 뭔가를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사람이다. 그렇다 보니 그런 모습으로는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스스로 정죄를 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인생으로 오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 하셨다. 즉 뭘 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그 존재 자체가 내게 기쁨이 되는 존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 우리도 그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성도요 또한 그분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하나님을 모든 범사에 기쁘시게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기뻐하는 자라는 것은 존재가 기쁨을 주는 자니 뭘 해도 기쁘다는 뜻인데, 우리가 그런 존재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존재로 다가가지 않고 공로의 업적과 소유의 드림으로 다가가는 사람만이 가지는 두려움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치고 예수님께 가치를 두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싶지만, 가치는 그 목적에 맞게 가치를 두어야 한다. 얼마 전 TV ‘안녕하세요.’에서 다른 것에는 짠돌이면서 축구공에는 엄청난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이 나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축구공을 관상용으로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아들이 유치원인가 어린이 집에서 아이들이 축구공을 차는 것을 보고 울었다고 했다. 축구공은 보는 것인데 발로 찬다고 말이다. 이게 진정한 가치 부여인가? 아님 정신 나간 짓인가? 축구공은 축구장에서 차고 좋은 경기가 되도록 할 때 제대로 가치를 부여한 것이지, 집에 잘 모셔둔다고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처럼 예수님을 숭배하고 존중하고 사람이 감히 그렇게 될 수 없는 존재로서의 가치만 부여하고 있다면 그 정신 나간 축구공 수집가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도 예수님처럼 되기 위해 믿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이 죄가 없다면 나도 죄가 없는 존재이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면 나도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어야지, 예수님이 죄 없는 것은 인정하지만 내가 혹은 네가 죄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하고 또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면 도무지 뭐가 맞는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죄가 있어서 되겠느냐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죄 없다 할 수 없는 존재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같은 존재가 되어 나도 그분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아들로서 또한 죄 없고 의로운 자가 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는 것이 제대로 예수님의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그렇게 자신할 수 없는 인생은 자신이 하나님께 일을 하고 공로와 소유를 드림으로 예배하는 자요, 존재의 하나님을 소유와 공로의 신으로 격하시켜 가치를 상쇄시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밑도 끝도 없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는 없다. 그에 합당한 경륜과 고백이 있어야 한다. 교리가 정한 것을 뇌까린다고 되는 세계가 아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You may live…… 라고 되어 있지 않는가? 즉 삶이 그래야 한다는 것이지 교리가 그렇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범사에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존재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온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자신도 하나님 앞에 죄가 없는 아들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주님을 가치 있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며, 그는 마치 아들이 그 존재만으로 그 부모의 기쁨이 되듯 늘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를 위하여 간구하는 내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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