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1:6-8 중재자 에바브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3. 1. 22. 11:59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하는 목적은 골로새 교회에 들어온 철학과 과학과 같은 세상적인 가치관이 복음과 혼합되고 심지어 복음보다 귀하게 여기는 현상에 대하여 경계하기 위함이다. 이는 에바브라가 바울을 찾아와서 전한 교회에 대한 소식을 들은 바울 사도가 그러한 것이 교회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이를 교훈하기 위하여 쓴 옥중 서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두 가지 큰 오류가 있는데 그 하나는 영지주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율법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의 존재 목적인 하나님의 의와 그것을 표현하는 사람의 삶이라는 형식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 중에 하나를 버리거나 경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영지주의에 관해서는 요한일서나 유다서와 같은 말씀을 통해서 교훈을 하고 있고, 율법주의에 관해서는 로마서나 야고보서와 같은 성경 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단적인 사상들은 대게의 경우 다른 것과 결합이 된다.


영지주의는 사람의 육신을 부인하거나 폄하함으로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생각들(요일 4:3)이 천사숭배 사상과 같이 다른 영을 숭배하는 것과 타협을 하는 반면, 당시 유럽과 아시아의 인접한 지역을 중심으로 문명이 발달하면서 철학과 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세상적인 지식(골 2:8)은 본질이 아닌 형식의 일종이기에 신앙의 형식만 강조하는 율법주의적인 신앙과 타협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대인이 숭배하는 형식이 율법이라면 이방인은 철학과 과학이라는 형식을 숭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가치관이 교회에 혼합되거나 복음이 아닌 지식이 많음에 따라 교회에서의 권위가 바뀌는 것을 경계했고,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심을 부인하는 것을 심히 경계했다.


이러한 신앙의 타협에 관하여 잘 알 수 있는 성경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변화하신 산 위의 사건(마 17장)이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변화하셨을 때,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자 베드로는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고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라 했다. 


이 사건 속 베드로의 마음에는 <예수님 + 모세 + 엘리야>가 되면 더 좋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마 17:5)

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 사건은 바로 엘리야도 모세도 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말씀만 들으면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엘리야 - 불의 선지자, 기적과 능력의 선지자

모세   - 물에서 건진 자며 물을 건너고 물에 관한 실수한 물의 선지자며 율법을 받은 지도자


또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계실 때에 산 아래에서는 귀신들린 아이를 나머지 제자들에게 데려와서 고쳐달라고 할 때 그 부모가 말하기를 아이가 간질로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나이다 하나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였는데, 예수님께서 내려오셔서 아이를 고치지 못함으로 

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마 17:17)

라고 꾸짖으시고 그 아이를 고쳐주시고 이르시기를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으면 산을 옮길 것이라 하셨다.


아이가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는 것은 엘리야(불, 기적)로도 안 되고, 모세(물, 율법)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 외에 추가로 내 마음 안에 장막을 지어 모세와 엘리야를 둘 이유도 없다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이 변화산 사건이 주는 교훈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핵심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더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가장 완전한 하나님의 뜻이고 기뻐하시는 것이지 그것에는 심지어 모세나 엘리야라 해도 예수님과 더해야 할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골로새 교회의 상황은 바울 사도가 전하여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열매 맺는 중에 교회 안에 어떤 세상의 지식과 철학이 들어와서 그것에 능한 이를 더 칭송하고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에 이러한 지식을 더하여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이길 원하는 사상들이 복음을 오염시키려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바울 사도가 이를 경계하기 위한 편지를 보내어 이를 경계하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전한 복음, 세상의 철학과 과학과 결합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을 얻는 그 복음으로 골로새 교회를 개척한 에바브라가 너희를 위한 신실한 일꾼이며, 그가 전하는 말씀이 온전한 것이지 세상적인 지식과 철학을 가지거나 그것을 복음에 더하려고 하는 자가 너희를 위하는 자가 아님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초대교회 시절, 그리고 바울 사도가 염려한 그 염려가 지금 시대에도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일례로 교회에 좋은 파이프 오르간이 있으면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교회가 더 화려하고 좋게 지어지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기는 생각들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개인으로 보면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생각 역시 세상의 것과 신앙이 결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의 형제들에게 에바브라가 자신과 함께 종이 되었고, 너희 안에 맺은 열매가 에바브라에게 배워서 그런 것이지, 세상에 속한 학문에 배워서 그런 것이 아님을 이야기하며 에바브라가 바울 사도가 가진 복음을 너희에게 전한 일꾼이며, 바울 사도가 가진 복음을 전한 중재자임을 보증하며 편지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마치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중재자이시듯, 바울과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형제들 사이에 에바브라가 중재임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에바브라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바울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된 바울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인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인데,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참 보잘 것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름 ‘예수’는 그 당시 흔하고 흔한 이름이었고, 신분은 목수의 아들이었고,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그런 모습(사 53:2-3)이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당시 최고의 형벌인 십자가형을 받은 최고의 죄인이셨다.


그렇게 육신을 가지신 분이 그리스도로 오심은 우리의 모습이 비록 연약하여도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었고, 그것을 보는 사람이 육신을 가진 자신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 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믿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고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은혜를 입은 또 다른 사람, 그러나 예수님과 또 모든 사람과 같이 육신을 가진 동일한 인생이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은혜를 입은 사람, 그 사람을 보고 누군가가 또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은혜를 입게 된다면 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만나서 사도가 된 바울, 그리고 그 바울로 인하여 복음을 듣고 믿는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에 있어 예수님을 대신하고 바울을 대신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요 사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복음이지 세상적인 철학과 과학이 결합된 사상으로 돋보이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신앙의 사건이다. 철학이나 과학을 복음과 결합시키는 것이 신앙의 변질이라는 것도 매우 중요한 것이고,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런 변질이 없이 십자가의 도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 사람의 존재 목적을 깨닫고 그것만을 전하는 사람이 또한 그리스도(a christ)라는 것을 바울이 에바브라를 보증함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사람을 그리스도로 받는 신앙의 모습이다. '사람을 어떻게 그리스도로 받을 수 있느냐?' 한다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법의 표준이요 첫 열매가 되시는 장자이신 것이고, 그분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사람 역시 그리스도(a christ)의 삶을 살기에 사람을 그리스도로 받을 수 없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심을 인정하지 않음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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