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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기독교인들에게는 입에 붙은 말과 같이 익숙한 말이지만 왜 하나님이 아버지이신지 안다면, 이는 실로 놀라운 일이고 감사한 일이며, 남은 인생을 오직 주를 위하여 살 수 밖에 없게 하는 진정한 신앙의 진수가 아닐까 생각된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여!” 이 얼마나 환상적인 호칭인가? 이렇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에 있어 정말 의미가 있는 것은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의 정체성에 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기를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대부분 이 세상에 관한 것이 아닌가? 그것이 가난한 사람을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라서 숭고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런 모든 것이 대상의 차이와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결국은 먹고 사는 것을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며,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한다고 해도 그 또한 세상의 것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일 뿐이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그 무엇도 하나님 앞에서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말씀만으로 만드신 세상이 뭐 그리 대단하겠는가?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만드신 목적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상을 몇 번이고 만드실 수 있으신 하나님 아니신가?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죄악이 관영하자 홍수로 세상을 다 쓸어버리셨던 분이 아닌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필요에 관한 것이나 세상의 평안을 목적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아니시다. 그러셨다면 처음부터 칼과 같은 것은 필요 없게 만드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신 목적은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표현하시기 위함이지, 그 목적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들의 안녕을 목적으로 하신 하나님이 아니시다. 피조물의 안녕은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루치씩만 취하라 하신 것이고, 이어 나오는 주기도문에도 일용할 양식이라고 표현하시는 것이며,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 하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에 대하여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이라고 하셨다. 이름은 정체성이다. 코끼리는 코가 길어 코끼리다. 그게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특히 유대인들은 사람이 태어나도 그 이름을 우리처럼 바로 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라는 것을 보고 이름을 붙이고 그 전 까지는 누구의 아들 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예로 ‘바요나 시몬’이라 하는 것은 요나의 아들 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라면서 나타내는 성향을 보고 이름을 붙인다. 그래서 세베대의 두 아들에게는 보아너게(우뢰의 아들)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아마 성정이 불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은 하나님은 어떤 공로나 소유에 감복하시는 분이 아니라 ‘너는 나에게 어떤 존재이냐?’를 물으시는 <존재의 신>이심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 정체성이 같은 존재가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 쿵푸펜더에서와 같이 거위 아버지에 펜더 곰 아들 같은 것은 이 세상에 없다. 고로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은 그 아들의 정체성도 존재에 의미를 두는 존재라는 것이지 무엇을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곰이 거위에게 아버지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의 본질적인 의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심은 우리가 기도할 내용을 가르치심이라기보다 존재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천주교에서는 주기도문을 몇 번 외워서 회개하는 것도 있다고 한다.(영화 “신의 딸들” 중에서) 하지만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께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그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는 것은 내 아버지의 이름이 다른 이름과는 구별이 되는 이름이라는 의미이다. 거룩함이라는 것의 본연의 의미가 ‘구분되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그 이름 곧 정체성이 구분되시는 아버지께 아들로서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며, 정체성이 구분된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존재의 신이며, 아버지께 아들로서 구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하심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어떤 수고나 재물을 상납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는 관계가 아니다. 그런데 큰 교회에서는 하나님께 많이 헌금하고, 많이 수고하고, 더 힘든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가르친다. 세상 어디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그런 관계인가? 용돈 더 주면 아들이고, 그렇지 않고 자기 위해서 돈을 쓰면 종이 되는 것인가? 그런 아버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셨을 때 예수님을 버린 그 아버지이신 것이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아들 삼으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셔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렇게 말씀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아버지, 즉 소유와 공로를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그 아버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끌고 가는 아버지며, 십자가에 달린 아들을 구원하지 못하는 아버지이고,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이 만든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그들이 조각한 우상과 같은 아비지인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낳아지는 세계이고 존재 자체를 수용하는 관계이다. 무엇을 드리고 드리지 않음에 따라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그런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다. 아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기쁜 존재로 여기는 아버지가 아버지인 것이다. 그저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너무 기쁘고 사랑스러워 그를 위하여 목숨도 버리는 것이 아버지이다. 그 아들은 아버지가 가진 의와 본성이 육신으로 나타난 그러니까 성육신 된 존재가 아들이고, 아들에게 아버지는 자신이 가진 모든 의가 그 안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기쁨이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은 우리가 무엇을 드리기 때문이나, 교회에서 어떤 봉사를 많이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지신 의를 표현하는 존재가 됨으로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의는 당연히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에 있는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듯 말이다.


세상에서도 비록 육신으로 낳지 않은 사람이라도 자기 아들 같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자신이 가진 소망과 생각을 실현해 주는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은 하나님께서 생물학적으로 예수님을 낳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가진 말씀이 육신(요 1:14)이 되었기 때문에 아들이 되는 세계이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방법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임신과 탄생으로 아들이 되는 세계라면 예수님은 몰라도 인류 역사상 다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 이와 같이 바울도 디모데를 향해서 내가 너를 낳았다 했다. 바울은 결혼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자신의 모든 의와 생각을 디모데가 행하며 살아갔기에 디모데는 바울의 의에 대하여 낳은 아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성품은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다. 위대함은 이미 세상에 수없이 많이 지으셨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람이 나타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이다. 사랑은 위대해지는 방향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어떻게 내가 강해지는 것이 의가 되는 사람에게 연약한 존재가 사랑의 대상이 되겠는가? 그들의 눈에는 그저 패배자로 보일 뿐이다. 그래서 건축자의 버린 돌과 같이 버림을 받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을지라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운명을 받으시듯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 들여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그런 연약한 존재라는 고백이 있을 때 오히려 모퉁이 돌을 삼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모퉁이돌이라는 것이 위대하고 화려한 건축물을 지으려는 건축자의 위대한 기준에서 벗어난 존재이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본질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이라는 것은 그렇게 자신의 연약함이 인정되는 존재들 사이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연약하게 지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말과 같이 다리는 다리도 주시지 않고, 코끼리 같은 힘도 주지 않으셨고, 날개도 아가미도 없이 만드신 것은 우리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을 표현하기에 너무 적합하기에 그렇게 만드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의가 나타나는 육신을 가진 존재가 되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이 육신으로 나타나는 성육신의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1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하나님의 법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법 아래에서 되는 것이지 달리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의 육신을 통해 나타낼 때, 아버지의 의가 성육신이 되었던 예수님처럼 아들이 되는 것이지 그냥 난데없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롬 8장)고 하니, 그냥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삶이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삶이 되었을 때, 즉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듯 우리의 삶이 그러한 존재가 되었을 때, 비로소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에서 말씀하시고 성경에 기록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법과 의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존재의 관계로 회복되고, 우리의 모든 본성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되, 예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심 같이 우리도 존재이신 하나님의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서 부르는 이름이지, 공간적으로 하늘같이 인간이 이르지 못할 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일단 아버지라 불러 놓고, 당신께 좋은 것 드릴 수 있게 내 삶을 부요하게 해 주십시오 기도하는 그런 사기나 치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존재가 되지 않는다면 주기도문을 천만번 외운다고 해서 죄가 사하여 지기는커녕 인생을 낭비하는 죄만 더할 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큰 교회들은 이런 주기도문을 마치 주문처럼 예배순서의 마무리로나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주기도문을 드린다는 것,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기에 온전한 존재가 되어 기도하는 것은, 그 자체가 삶의 구원이요, 영광이요,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어 살아가신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은 소유와 공로로 기쁘시게 할 수 없는 분명한 존재의 신이시며, 우리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만나시기를 원하시는 분으로 확실히 구분되는 신으로 신앙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는 그 말씀 속에는 <너희는 하나님을 소유와 존재의 신들을 믿는 신앙과 분명하게 구분이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아들이 되어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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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Date : 2013. 1. 21. 12:06 Writer : 김홍덕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유일무이한 기도이다. 하지만 이 주기도문은 이제 큰 교회들에 의해서 예배 순서의 하나로 전락해 가고 있다. 그 의미가 인생의 전부를 걸만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시작한다. 이건 누구에게 기도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선언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것은 어쩌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도무지 어디가 하늘인가? 우리가 눈을 들어 올려다 볼 때 보이는 파란 하늘이 주기도문에 나오는 하늘인가? 그것은 아니다. 하늘은 의와 뜻을 가진 곳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늘이 정한다. 올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아 아직도 곳곳에 눈이 쌓여있다. 하지만 하늘이 변하면 모든 것이 다 변한다. 눈도 녹고 꽃도 핀다. 또한 하늘이 변해서 비가 오면 이 땅의 모든 사람은 다 우산을 쓴다. 시킬 필요도 없다. 하늘이 변하면 다 맞추어 사는 것이다. 그것이 하늘이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심은, 하나님은 그렇게 모든 것을 정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시면, 마치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이 땅의 모든 사람이 비 오는 것에 맞추어 생활방식을 바꾸듯,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공간적으로 우주에 계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정하시고 의와 뜻을 가지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으로 기도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큰 교회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우주에 계신 하나님으로 가르친다. 적어도 그렇게 착각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하늘에 대한 다른 설명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큰 교회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이 장소에 따라 계신 곳이 있고 아닌 곳이 있다고 여기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가장 쉬운 예로 교회의 강대상이 거룩하다는 것이다. 무소부재(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신)의 하나님이 강대상에 더 계신다? 그래서 더 거룩하다? 이게 정말이라고 생각하는가?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도 하늘로 올라가셨다. 사람들이 그것을 지켜봤으니 사람의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속도였을 것이다. 그런 속도로 2,000년간 올라가셨다면 지금 우주 어디쯤 가셨을까? 화성까지나 제대로 가셨겠는가? 성경은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리어지셨다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의와 뜻을 가진 존재로, 그런 존재의 자리로 가셨다는 것이다. 그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성경에 기록한 것이지, 우리가 고개 들어 보는 그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한정적 이야기가 아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며 말씀하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에 나오는 하늘은 공간의 하늘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체성에 대한 자리인 것이다.


큰 교회는 교회를 아주 거룩하게 여긴다. 예배당이라는 그 장소가 거룩하다 여기며 그곳에 와야 예배가 거룩해진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수가성에서 만난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 하셨다. 즉 어느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큰 교회들은 예배당을 거룩하게 여기고, 강대상에는 특정한 신분을 가진 사람만 올라갈 수 있다는 신앙 없는 소리를 해대고 있다. 알고 보면 그 신분이란 것도 자신의 노력으로 시험 쳐서 목사가 되거나 돈으로 장로가 된 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인가?


그렇듯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늘이라는 것이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자리로서의 하늘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믿어야 한다면 우리는 매주일 마다 이스라엘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나님을 무소부재하신 분이라 믿을 이유가 없다.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시니 그분이 계신 곳이 거룩한 곳이어야지, 강대상은 더 거룩한 곳이니 아무나 올라갈 수 없다? 그런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인간이 구속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어디에는 계시고 어디에는 계시지 않는다고 믿지 않는 다음에서야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의 하늘이 공간적인 하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실제로 예배당은 거룩하다. 다만 그곳만 거룩하지 않다. 또한 예배를 그곳에서 드리기 때문에 거룩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곳은 성도가 모이기 때문에 편리하게 하기 위해 존재하면 된다. 하나님은 온 땅에 충만하시고,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고 했는데, 우리가 언제부터 예배당 없으면 예배도 못 드리고, 거룩함도 상실하게 되었는가? 이런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을 보는 안목이 세상적인 안목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인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늘에 계신>이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 당신은 모든 의를 가지신 분이십니다”라는 고백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있어,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 되심에 대한 고백이다. 이것은 또한 땅이 하늘을 좇아 수용하게 되듯 사람은 하나님의 본성을 따르는 존재라는 것을 알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지, 예배 때 목사가 없으면 마치는 순서로 사용하는 그런 주문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 이는 하나님은 모든 뜻과 의를 가지신 분으로 내가 인정하고 부를 때, 그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게 되는 것이고, 우물가 여인에게 말씀 하신 예배하는 그 때가 되는 것이다. 이는 공간에 관함이 아니라 상태에 관함이다. 하나님은 공간적으로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니라, 상태로서 모든 것의 의와 뜻과 시작과 끝이 되심을 말할 그 때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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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1:3-5 성도의 사랑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3. 1. 21. 11:04 Writer : 김홍덕

기독교를 학교에서 배울 때 <사랑의 종교>라고 정의한 것을 배운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큰 교회들은 나도 너도 할 것 없이 사랑을 외친다. 밥을 퍼주기도 하고, 노숙자들을 위한 숙소를 제공하기도 하고, 가난한 나라에 후원하는 등 사회적 관점에서 사랑과 봉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분명히 이런 점은 칭찬을 받아야 하고 장려되어야 하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이런 활동들이 하나님 사랑의 본질은 아니다.


사랑의 본질은 정체성을 알려주는 것에 있다. 즉 존재의 이유를 알게 하고, 또한 그 존재의 이유가 서로의 관계에 의미가 외는 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인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의 이유와 의미가 되는 것 이상의 사랑이 없는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개인과 조직 아니 세상의 모든 만물은 그 본연의 존재 목적이 있다. 이것에서 벗어나면 다른 것을 아무리 잘 해도 소용도 없을 뿐 아니라 죽은 것이거나 아니면 버려질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목적 안에서가 아니라면 뭔가 하면 할수록 문제가 되고 죄가 되는 것이다.


남녀사이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가 있는 관계가 아닌데 애착을 가지고 계속 선물하고 만나자고 하는 것은 스토킹이고 죄며 괴롭히는 것일 뿐 아무리 마음이 간절해도 사랑이라 할 수 없고,. 해적이나 간첩이 자기들끼리 아무리 사랑하고 우정이 두터워도 가장 먼저 국민으로서 나라의 의에 동의하는 것이 선결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우정도 한낱 반역죄에 불과한 것이 그것이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이다. 이 교회는 가장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명확하여야 한다. 그리고 난 다음에 뭘 해도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교회가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알려주는 하나님의 사랑은 외면하고 있다면 그 어떤 사회적인 기여도 사랑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에 관하여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즉, 요한 사도는 <사랑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이 의미 있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고, 그 의미 있는 관계는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신의 삶의 목적이 되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관계가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 살아가는 의미를 알게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기에 바울 사도가 골로새의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를 할 때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어서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되었다는 것과 또한 평강과 은혜로 문안하는 것이나 다 같은 맥락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맥락이 바로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상태가 되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삶을 공유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성도며, 그런 삶의 모양은 그런 사람들에게 육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헌신하는 사랑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사랑이다. 바로 그 사랑을 성도의 사랑이라고 바울 사도는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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