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3

교리의 함정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7. 3. 19. 20:42 Writer : 김홍덕

기독교 신앙에는 교리가 있습니다. 교리는 ‘체계적인 종교의 가르침’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교리는 그 존재의 명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이 그 골격을 유지하고, 불순한 이론이나 신앙관과 명백한 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단과의 선명성을 분명하게하기 위한 것’이라고 간단하게 정의를 내려도 될 것 같습니다.


모든 신앙에 있어 ‘이단’은 분명히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세계라도 그 본질을 흐리게 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정통성이나 순도를 잘 유지하는 것이 바른 선택이고 정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단과의 경계를 정하므로 그 정통성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기됵교 역시 그 방법을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정립한 교리라는 것, 그리고 그 교리의 존립 이유와 정통성이 성경적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성경이 정통성을 보장하고 있지 않다면 이는 온전한 신앙을 가지지 못한 것을 가리기 위한 가면에 불과한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규율이 없어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잘 아는 것과 같이 애굽에서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그 과정에서 홍해와 요단강을 건넙니다. 이 과정에서 광야를 지날 때에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뜨거운 낮에는 구름기둥 밑을 지나게 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또한 보호하셨습니다.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단지 온도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는 가이드였습니다. 구름기둥이 일어나서 움직이면 모든 백성들은 자기 짐을 들고서 그 구름기둥을 좇아서 따라가야 했습니다. 이는 불기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대형을 유지하여야 했습니다. 한 마디로 신앙에 있어 규율이 분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형을 벗어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가이드를 떠난다는 것은 곧 죽음이나 곤고함을 당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마치 신앙이라는 것이 교리를 벗어나면 이단에 빠지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신호이기는 했지만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서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 세례요한의 모습을 이사야 선지자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즉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니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하고, 예수님께서 다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전하니 <복음>이 전파된다고 했습니다.


광야에서는 어떤 규율이 있어야하고 이를 벗어나면 곤고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이를 역설적으로 본다면 어떤 규율이 있어야 그 신앙이 온전하다면 그의 신앙은 <광야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광야는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여정은 분명하지만 더욱 분명한 것은 광야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즉 사람에게 약속하시고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이 광야 곧 규율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자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서자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밟는 모든 땅이 너희의 것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유지해온 대형이 해제된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지파의 수장들끼지 상의하여 ‘저 땅을 위하여 너희 지파와 우리 지파가 나누자’와 같이 의사를 정하고 마음대로 자기의 영역을 넘나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가나안 땅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약속한 자리로 가면 어떤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마음 안에서 나오는 것을 표현하고 누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자리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정한 자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자기 생명이 된 사람의 생명은 제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전 기물은 쳐서 만들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전의 각종 기물을 만들 때에 금과 은으로 많은 것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들라고 하신 것은 단 하나가 아니라, 같은 모양의 것을 여러 개 만들어야 하는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금과 은으로 같은 모양을 여러 개 만들라고 하시면서 금과 은을 쳐서 만들라고 했습니다. 같은 모양을 여러 개 만들 때 먼저 금형(틀)을 만들어 금과 은을 녹여서 부어서 만들면 일정하게 나올 것인데 굳이 쳐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쳐서 만들면 아무리 잘 만들어도 똑같기 힘든데도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저지른 가장 큰 범죄라고 할 수 있는 금송아지는 부어서 만든 것입니다. 큰 금송아지를 단 하나 만드는데도 사람들은 부어서 만드는데 하나님께서는 성전의 작은 기물들을 만들 때도 반드시 쳐셔 만들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모든 법은 생명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란 속에서 안으로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안에서 밖으로 자라고, 안에 있는 DNA가 모양으로 또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먼저 겉모양을 만들고 그것에 녹여 붓는 것은 밖에서 안으로 만드는 것이지만 금과 은이 펴지고 다시 다듬어져서 형상을 이루는 것은 안에서 밖으로 형성되어 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부어서 만들라고 하시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은 어떤 틀을 만들고 그 안에서 형상으로 굳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기물이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거하는 장소와 그 내용은 정체성이 같은 것입니다. 커피는 커피 잔에, 콜라는 음료수 컵에 따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즉 성전의 기물을 부어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사람 또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표현하는 하나님의 성품 또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설명하고 규정할 수 없다.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의 마지막에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다 기록하려면 하늘을 두루마리로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다 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욥기 후반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쏟아 붓듯 하신 질문을 봐도 사람은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정체성이나 한계나 믿음의 범위를 규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정의한다고 해도 무한하신 하나님 안의 어떤 부분집합일 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미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에 고넬료에게 가보라고 하나님이 꿈에서 말씀하실 때에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가라는 말씀을 하시기 위하여 율법에 부정하다고 한 짐승을 꿈에서 먹으라 하시니 베드로는 ‘먹을 수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정하다고 한 것을 어찌하여 부정하다고 하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우리가 교리라는 가이드로 하나님을 규정하는 것은 언제나 모자랍니다. 많은 사도들이 영지주의와 율법주의를 경계하면서 말씀을 전하고 서신을 보낼 때에 복음의 경계를 전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전한 것은 복음의 외형을 바로 잡으려 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씨만 전하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땅에 씨가 심겨서 싹이 나는 것과 같아서 생명이 있는 씨만 전하면 그것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그 씨의 생명대로 자라게 됩니다.


영화 쿵푸팬더 1편에서 우그웨이 사부(거북이)와 씨푸 사부(너구리)가 복숭아나무 아래서 이야기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제는 팬더가 용의 전사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씨푸와 믿기만 하면 된다는 우그웨이의 논쟁입니다.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우그웨이에게 씨푸는 복숭아 나무를 차서 복숭아를 떨어뜨리리고 그 중에 하나를 주워 반으로 갈라 씨를 땅에 심으면서 운명을 이렇게 바꿀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때 우그웨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복숭아씨로 사과가 열리게 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법은 온전한 하나님의 법이 씨가 땅에 심기듯 사람 안에 심기면 그 씨는 절대로 다른 것이 되지 않습니다. 즉 이단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신앙이 이단이 된다는 것은 처음부터 가라지였거나, 생명이 생명의 본성대로 살지 않아서 그런 것뿐입니다. 이 두 가지는 어떤 것도 교리와 같이 어떤 규정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이단이 되지 않고,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려 한다면 온전한 하나님의 씨만 심으면 되는 것이지 생명이 씨가 싹이 난 다음에 그 생명을 어떻게 다른 것으로 바꾸거나 모양이나 성질을 바꾸려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하여 교리가 필요하다고 여긴다는 것은 오히려 자신들의 신앙이 생명의 법 밖에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 예수의 정체성 전체를 하나의 교리로 본다면 그것은 온전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정체성 전체를 교리로 보는 것은 온전하나 그것을 규정하려 든다면 그것은 또한 동일한 오류에 빠질 것입니다.



교리는 결론이지 본질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많은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리가 하나님 성품과 의와 뜻을 다 포함하지 못하는 부분집합이기는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닙니다. 또한 율법주의나 영지주의와 같이 온전치 못한 신앙의 관점을 배척하여야 하는 것 또한 절대적 가치에 준하는 중요한 것입니다.


문제는 결론이란 과정과 내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믿고 고백하는데 왜 그런지 모른다면? 또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그리스도이심을 보이신 것은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존재가 되기 위하여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심인데, 교리로 예수는 그리스도라 하면서 사람이 그리스도가 된다고 하면 교리에 어긋난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온전하시면 세상을 경영하신다고 교리를 정하여 놓고서 이 세상이 불온전하고 문제가 많으니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기도하는 하는 것은 교리를 다시 부정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교회가 가진 모순된 모습입니다. 교리를 넘으면 이단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자기들이 정한 교리를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교리의 함정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신경과 같은 고백이나 또한 많은 교리들은 마치 율법과 같습니다. 그것을 지켜서 신앙이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신앙이 있으면 온전한 고백을 하고 교리로 규정한 모든 것이 그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리로 모양을 규정하고 만들 것이 아니라 온전한 생명의 법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 내용과 본성이 온전하면 교리로 정한 것은 자연적으로 갖추어질 것입니다. 내용 없이 교리만 지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칠한 무덤>일 뿐입니다. 교리를 지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의만 자기 심령 안에 있으면 그 어떤 교리도 다 지키는 사람이 되고, 생명이 그 본성이 변하지 않듯, 이단으로 변질되는 것 또한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입니다. 표현은 다양합니다. 무궁무진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하시려 만드신 이 세상이 얼마나 다양하고 풍성한지 우리가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의 의가 땅에 씨가 심기듯 우리 심령 안에 온전히 심기고 우리의 마음 밭이 잘 경작되어 있다면 하나님의 의 이외에 그 어떤 것으로도 표현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만 전하고 이것에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어떤 교리도 온전히 지키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교리는 결국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한 성경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온전하심만 심령에 있다면 절대로 이단이 되지 않습니다. 이단이 되는 것은 심긴 씨가 가라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생명은 전하지 않고 교리만 전하는 거짓 목자들의 씨를 받아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하나님의 의를 자기의 것을 삼는 교만으로 인함이 아니라면 온전한 하나님의 의는 사람으로 인하여 훼손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의에 대한 그 정도의 믿음은 있어야 믿음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리는 온전한 것이나 그 온전함이 사람의 행동이나 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령에 있는 것입니다. 즉 심령에 그 교리로 정의될 수 있는 의가 있고 생명이 있을 때 교리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심령에 내재된 사람에게는 흔히 말하는 교리는 다 자기 안에 있기에 그에게는 교리가 온전한 것이나,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없는데 교리로 자신이 신앙이라고 대변한다거나 사도신경과 같은 고백을 하는 것은 다 거짓말 하는 것일 뿐입니다.



교리 이전에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가 훼손될까 염려하여 교리를 옹립하거나, 교리를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한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회칠한 무덤과 같은 신앙일 뿐 아니라 성경을 어떻게 요약하고 정리한 교리도 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의 의는 없이 성경을 요약하고 학문적으로 정리해서 교리로 만들어 믿으면 뭐할 것이며,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 삶으로 나타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논하는 것이 이단인데, 그 심령으로 하나님의 정체성이 훼손될까 하여 또 이단이 득세할까 하여 교리를 정립하는 것은 다 거짓된 것입니다. 


따라서 교리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성경의 어떤 것으로도 자기 신앙이 고백될 수 있는 심령,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생명이 되어서 그 생명이 표현되는 삶, 성경을 주신 목적이 자기 본성이 되어 살아가면 성경이 자기 이야기가 되는 것이 모든 교리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리라면 온전한 것입니다. 그것이 아닌 모든 교리는 다 노릇일 뿐인 것입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눅 16) 불의한 청지기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예수님의 비유와 기적 Date : 2017. 3. 17. 22:05 Writer : 김홍덕

이 불의한 청지기가 어렵게 여겨지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의>가 누구의 의인지에 대한 혼돈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불의한 청지기의 불의함을 돈에 대한 청렴함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불의함은 돈에 대한 청렴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티브를 제공하는 것이고 본질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형식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모든 것, 재물과 육신과 철학과 학문과 사상과 같은 것을 주셔서 그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라고 했는데, 그 표현 형식인 재물과 육신과 철학과 학문과 사상과 같은 것을 주의 일에 사용하지 않고 낭비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낭비한 것은 주인의 재물이 아니라 주인이 재물을 맡긴 의와 목적을 낭비하고 있었다는 것


청지기는 자기 주인의 재산을 맡은 사람입니다. 단순한 창고지기가 아닙니다. 이 당시의 청지기라고 하면 주인의 도장을 가지고 다니면서 주인의 사업에 대한 계약도 체결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인의 생각과 의를 집행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사람이란 마치 인감도장을 맡았듯이 하나님께 하나님의 성품과 의를 표현하는 것을 맡은 존재인데, 그 목적을 위하여 위임 받은 주인의 세간살이 곧 주인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물질과 만물을 자기 맘대로 사용하더라는 것입니다. 육신을 가진 인생이 본질이고, 자신이 그 인생의 주인인양 주님이 주신 것, 육신과 가진 것을 낭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청지기가 본분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청지기를 불러서 주인의 의를 얼마나 표현했는지 셈을 하고 파면시키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셈을 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셈을 해 보니 주인에게도 주인이 주인의 재물로 주인의 의를 나타내라고 한 대상들에게도 다 셈이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그 청지기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연약하여 주인의 청지기로 사는 것이 아니면 자신이 살 방법이 없다는 것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바로 앞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이 타국에서 스스로 뉘우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서 그 빚을 자기 맘대로 탕감해 줍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더 불의한 것이지만 이것을 불의하게 여기는 것은 돈에 대한 청렴함이 의로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주인이 의롭게 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 부자 주인이 원하는 것은 청지가 돈에 대하여 청렴하기를 기대하고 주인의 모든 것을 맡긴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이 주인의 의로움과 영광을 나타내라고 맡긴 것이기에 세상 사람들이 그 주인이 의로운 사람임을 알도록 하는 일에 청지기가 맡은 것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의로움인 것입니다.


이것은 달란트 비유에서도 나옵니다. 주인이 한 달란트 받은 자를 책망하기를 ‘너는 내가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알았더냐?’(마 25:26)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을 책망하신 것은 주인이 달란트를 맡긴 것은 주인의 의를 나타내라고 맡긴 것이지 그것을 보존하라고 맡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인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 준 것은 주인의 재물이 주인을 영화롭게 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보존하고, 육신의 삶을 부유하게 하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과, 신앙인이라는 명성과 권위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양초를 가지고 불을 밝히지는 않고 보존만 하는 것과 같이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소비하므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청지기는 정확한 인식을 했습니다. 먼저는 자신은 주인의 청지기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지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을 맡은 존재로 사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가 지혜로운 첫 번째 이유입니다. 


다음으로 그는 청지기의 본분이 무엇인지 뒤늦게 알았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극에게 재물을 맡긴 것은 그 재물을 활용하여 주인의 의로움을 나타내라는 것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빚이 있는 자들을 불러서 그 빚을 탕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행위는 부정하게 보일지 모르나 그에게 청지기의 임무를 맡긴 것에는 충실했다는 것입니다. 전투는 졌지만 전쟁은 이긴 군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덤으로 그는 그렇게 하면 빚을 탕감 받은 이들이 나중에 자신을 돌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하나님의 의와 성품과 형상을 표현하는 일을 맡은 사람은 그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므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깨닫게 되도록 살아내므로 그것을 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회복되게 하는 본분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이 청지기는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본질은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도 필요하고 재물도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가진 문제는 그것을 동일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같은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같은 성질을 가진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동일하게 목적으로 여기거나, 동일하게 수단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돈을 섬긴다는 것은 곧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돈으로 자신을 보존하고 부유하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가치관은 돈 앞에서 정직해야 불의하지 않다고 합니다. 이는 형식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은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주신 목적대로 사용하는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적을 섬기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삶을 보고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삶을 주신 목적을 알거나 둘 중에 하나만 섬긴다는 것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자가 게으로고 악한 종이라 하신 그 기준으로 이 청지기는 불의하나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었습니다. 주인의 모든 것이 다 주인의 의로움을 나타내는 것에 사용되는 것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돈에 대하여 청렴한 것을 의롭게 여깁니다. 돈은 세상 가치관의 대표성을 가진 것입니다. 돈이 많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에 부합된 공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적합하고 그 가치관에 의하여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유함을 누가복음 16장에서는 ‘worldly wealth’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부유함’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누가 참된 것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고 말씀하신 11절에서 참된 것은 thru rich리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된 것은 진정한 부유함이라는 것입니다. 즉 세상적인 재물은 참된 부유함을 위하여 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세속적인 부를 축적하는 것이 본질인양 살고, 눈에 보이는 세상의 돈에 대하여 청렴한 것이 의로움이라고 사는 것은 오히려 불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물(worldly wealth)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십니다. 친구는 의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청지기의 의는 주인의 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 사는 동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사람들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불의한 재물(worldly wealth)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라는 것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삶에 대하여 오판하면 자신 자기 삶의 주인이라 여기게 되고, 또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 여겨 그것을 추구합니다. 모든 의로움도 그 눈에 보이는 것을 세상적인 기준으로 가늠하여 의로운지 아닌지를 판단합니다. 이 청지기도 처음에는 자기에게 주신 청지기의 직분이 주인의 의를 나타내라고 한 것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주인의 것을 자신이 낭비했습니다. 탕자처럼.


그러나 주인이 돈에 대하여 청렴하지 않음이 아니라 목적을 상실한 불의함을 알고 그것을 셈하겠다고 하니 그제서야 자신 존재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주의 말씀을 듣고 회개한 것이고, 빛이 있게 된 것이며, 아버지 집에서 품꾼이라도 해야겠다는 돌이킴이 있고 난 다음에 지혜로워진 것입니다. 주인이 자기에게 모든 것을 맡긴 의도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집행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이 자기 것인 줄 압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그렇게 여깁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존하고 부유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이라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보내시지 않습니다. 사람 그 자체가 풍요롭게 되는 것을 복으로 여기시지 않습니다. 사람이 가진 것은 그것이 무엇이라도 주인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사용해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이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Translation by Google)


(Luke 16: 1-13) Unrighteous stewardship


The most important reason why this unrighteous steward is considered to be difficult is because of confusion about who is righteous. People are stuck in the frame of this unrighteous steward's unrighteousness for money. But this injustice is not about the integrity of money. It is a motif and the essence is about God's righteousness. This is wasting form in terms of content and form.


God gave us all things in the world, such as wealth, flesh, philosophy, scholarship, and thought, to express God's righteousness in all of it. I was wasting it without using it.


The unrighteous steward was wasted, not the master's wealth, but the master's wasted righteousness and purpose in leaving it


A steward is a person who is in charge of the property of his master. It's not just a warehouse. The steward of this time was someone who could carry a master's seal and sign a contract for his master's business. In other words, he was the man who carried out his thoughts and righteousness.


This is what Jesus said that man is the one who is responsible for expressing the character and righteousness of God to God as if he had undertaken the seal of the seal. The substance of the master who was commissioned for that purpose, He is using his own way. That the life with the flesh is the essence, and that he was the master of his life, wasting what the Lord gave him, the flesh.


However, the master knew that the steward was not doing his duty. So the master called the steward and asked him how he expressed his master's righteousness, That is why I tried to calculate myself. It means that even to the master, the master can not be counted on the objects that the master has shown the master's righteousness as the riches of the master.


Then the steward will think. He thought that he had no way of living unless he was weak and lived with his master's stewardship. This is the same as that of a small son in a foreign country, in 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 just before this parable of the unrighteous steward.


So the steward calls the debtors to his master and forgives the debt for his own sake. This is more unrighteous in some ways, but dismissing it as unfair is that the integrity of money is perceived as righteous, but that the master is not justified. The rich man wants what he does not expect to be honest about money and entrusts everything to his master, but has entrusted the world with the righteousness and glory of the master, so that the world knows that his master is righteous It is righteousness to use what the steward has in his work.


This comes from the talent parable. The Master rebuked the one who received the talent, saying, 'Did you know that I gathered from the sowing, and gathered from the ungodly?' (Matthew 25:26). The reproof of a servant who received a talent is that he has entrusted the talent to show the master's righteousness, but not to preserve it.


He forgave the debtors of his master for knowing that his wealth should be used to glorify his master


I think that it is glorifying God to keep the flesh and the faith and the authority of God, because many people preserve life and make the physical life rich. It is as if you are living your life as if you do not light a candle and save it. Life is not to preserve it, but to consume it, that is, to show the righteousness of God, but to live in the opposite way.


This steward had an accurate perception. First, he knew that he could not live unless he was the master's steward. That is, man knew that there is nothing to do except to live as a person who is responsible for the righteousness of God. That is the first reason he is wise.


Next, he knew that his stewardship was late. It is understood that the owner entrusts the property to the pole to utilize the property to show the master's righteousness. That is why they called those who owed money to their owners and forgiven them. The act may seem fraudulent, but he was faithful to the task of stewarding him. The battle is lost, but the war is a soldier.


And in the end, he thought that if they did so, those who had been forgiven would later take care of themselves. It is saying that we are buying our sins. The person who is responsible for expressing God's righteousness, character, and image is to show God's righteousness, so that others will live to understand God's righteousness, so that those who have seen it will have the duty to restore sin before God That steward knew it.


The essence of this parable is to say that man can not serve both God and wealth at the same time. But man needs God and needs wealth. The problem with people is that they regard it as the same. It is not that we regard God and wealth as the same, but that we have the same nature. It means that God and man are regarded equally or by the same means.


To serve money is to serve the world. It is living in the values ​​of the world. The value of the world is in saving and richting oneself with money. It is said that the values ​​of such people are not unjust because they are honest in front of money. This is to serve the form. But serving God as master is another. All that God has given us is not to preserve it, but to know that it is to be used for the purpose that we have given. It is to serve the purpose.


A person knows that he sees what he sees in his life when he sees his life given by God or knows the purpose God gave to life,


The steward was a wise steward of fire, according to the standard that the one talent received from the talents of talents was a crab logo evil servant. And that all of his master is to be used to represent the master's righteousness.


Many people justify the integrity of money. Money is a representation of world values. A lot of money means that there is a merit that meets the values ​​of the world. It is a person who is fit for the world's values ​​and righteous by its values. This richness is expressed in Luke 16 as 'worldly wealth'. It is called 'secular wealth.'


On the contrary, in verse 11, who said, "Who will entrust you to the truth?" The truth is that it is true wealth. That is, worldly wealth is spent for true riches. It is rather unjust to live as a nature to accumulate secular wealth rather than to use it, and to live as righteousness for the money of the world that is visible to the world. That is why God did not make us in the image of God. It is not what you entrusted to us.


So Jesus calls us to make friends with worldly wealth. My friend is that righteousness is the same person. The righteousness of the steward is to represent the righteousness of the master. That is to get people who represent God's righteousness in everything they have while living in the world. This is also a preaching of the gospel.


To make friends with worldly wealth is to express God's righteousness with all that you have


When a person misjudges God's life, he or she sees it as the master of his own life and sees it as the essence of what he sees. All righteousness judges whether it is righteous by measuring what is seen by the world standard. This steward did not know at first that the stewardship that he gave to him was to express his righteousness. So I wasted my own thing. Like a prodigal son.


However, the master said that he would know about the unfairness of money, not the unfairness of money, but to count it, so there was a clear awareness of his own existence. That is, he has heard the word of the Lord, has repented, has become a light, and has turned to be a hired man in his father's house. The master has learned the intention of entrusting everything to him. So he enforces it.


People know that life is their own. That's what you have. And to preserve it and to be wealthy is blessed by God. But God never sends people to this earth to preserve them. We do not regard blessings as being blessed by man itself. What man has is what he uses to express his righteousness whatever it is. That's why people exist and purpose. Jesus is saying that.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야고보서 5:12) 맹세하지 말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야고보서 Date : 2017. 3. 16. 07:12 Writer : 김홍덕

맹세. 그것은 어떻게 보면 간절함의 표현이고, 다른 편에서 보면 믿음의 확실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마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맹세’가 가진 가장 큰 성격은 바로 ‘능동성’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증명하려는 마음으로 중요한 것을 담보로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께서도 또 야고보 사도도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맹세라는 것이 그 자체로도 호불호가 갈리는 느낌을 주지만, 성경에서 맹세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첫째 신앙은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수동적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 자기 스스로 인생에 들어온 것도 아닌 사람이 그 어떤 담보를 내세워도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맹세한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자신의 믿음이 더 앞선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고, 무엇을 담보한다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소유라는 의미나 실상은 세상에 자신의 것은 없습니다. 인생 자체를 자기가 선택한 것이 아닌데 뭐가 자신의 것이겠습니까? 그 어느 것도 자신의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블로그를 줄곧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라고 늘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신 것”이라는 말씀이 그렇고, “하나님께 먼저 드림으로 갚음이 있겠느냐?”는 말씀이 그렇고, “숫양의 기름보다 듣는 것이,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것에 대하여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죄를 면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런 말씀들 앞에서 ‘그럼 사람은 그냥 아바타인가?’라는 반문을 가집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또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정성으로 무엇을 드리는 것이 귀한 것임을 나타내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존엄성, 곧 가치는 목적에서 나오는 것이지 존재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 아프리카에서는 다이아몬드 원석으로 아이들이 공기하듯 가지고 놀았다고 했습니다. 다이아몬드가 목적 안에 들어가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존엄성이라는 것, 사람이라는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 인생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부질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존재 목적을 알고 난 다음의 일이지, 자신이 존재하고 살아가는 목적도 모르는데 존엄성은 아무 의미 없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 가치는 목적에서 나오는 것이지 존재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해적들이 서로에 대한 우애나 선장에 대한 충성심이 아무리 좋고 높아도, 존재 정체성이 역적이고 죄인인데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인생들도 자기 의지로 들어온 인생을 알면서도 자기 존재의 목적을 외면하고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로 삶의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창조주에 대한 명백한 죄인 것입니다. 즉 목적의 자리를 벗어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든 것에 앞서서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수동적 존재이기에 먼저 이것이 선행되고 나면 그 다음에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이끄는 능동적인 삶을 살든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도 자기 믿음이나 의을 나타내고 증명하려고 자기가 창조하지 않은 그 어떤 것으로 맹세함에 담보로 건다는 것은 오만한 죄입니다.


또한 그것은 자기가 만들지도 소유하지도 못하는(결국 죽으니까) 세상의 모든 것을 마치 자기 것인 듯 자기 신념을 증명하는 담보로 내세우는 것은 한 마디로 그냥 도적질입니다. 사기꾼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순종하고 수용하는 수동적인 정체성을 유지하지 않고, 또 자기 것도 아닌 것으로 담보를 내세우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벗어난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죄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기 정체성을 벗어난 것 그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라”고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것이 아닌 삶 앞에 펼쳐지는 일들은 사람이 바꾸려 하거나, 틀렸다 말하거나, 그것이 어떤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형제들, 곧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행사로 알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나타내시는 일로 알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Translation by Google)


(James 5:12) Do not swear.

 

Swear. It can be a kind of expression of desire, and on the other hand, a heart to demonstrate the certainty of faith. However, the greatest characteristic of 'oath' is 'activeness'. It is because of the fact that it is important to prove itself as a collateral. But unfortunately, Jesus and James also say, 'Do not swear.'


Of course the swearing by itself gives the impression of humiliation, but the Bible tells us not to swear firstly that faith is not active but passive, and that any man who has not entered his life for the second time, It is not his own.


Therefore, to swear is to assert that his faith is ahead of God, and that what is secured is that it is his own, and in fact there is no one in the world. Life itself is not what you chose, but what is your own? None of that is his own.


People who have watched this blog all the time say that faith is passive. The saying, "We did not love God first, but God loved first." And the saying, "Is there any reward for returning to God first?" "It is better to listen to the oil of the ram than to obey the priest. It is better ".


The Apostle James says that "yes, yes, but not yes". And I say that this is to avoid sin. However, many people have the following statement in front of these words: "Is it just an avatar?" It seems to indicate the dignity of man and that it is precious to give thanks to God for His grace, but truth is sin.


Dignity, or value, comes from purpose, not from existence itself. In ancient Africa, it was said that the children play with air stone like diamonds. It is because diamonds can not enter into purpose. It is not dignity that it should be able to live the life of oneself with the dignity of person, the person's self-identity of the person, but it is the next thing after knowing purpose of existence only, It is not. As I mentioned earlier, value comes from purpose, not from existence itself.


No matter how good or loyal the friendship and the loyalty to the captain are, the pirates have no meaning when the identity of the being is reversed and sinful. Even though the life knows the life that came into its own will, It is an obvious sin against the Creator to give the value of life by itself. That is, it is out of purpose.


Therefore, one has to restore the identity of one's being before everything else. Since man is a passive being who accepts God's righteousness, if this is done first, then he must live a proactive life led by the righteousness of God in him. Therefore, it is arrogant sin to pledge any thing to swear by something that is not created by man to demonstrate or prove his faith or righteousness.


In addition, it is just a thief to steal everything in the world as a self-assured proof of his belief that he is neither made nor possessed. It's a con. Therefore, it is beyond self-identity that a person does not maintain a passive identity that obeys and accepts God's, and that it is not self-assured. Therefore, it is sin. Sin is not different. It is out of self-identity because it is sin.


This is what the apostle James says "do not do it but do not do it". The things that are unfolding before man, not his own, are that a person is trying to change, say wrong, or do not claim to be what it is. If you are brothers, those who receive life from God, you know that all the work of God's world is an act of God, and in that God reveals His character. It is saying that it is more important than anything else.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