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사람의 육신을 가지고 사람이라 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짐승 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말도 한다. 짐승 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은 짐승 이상의 그 무엇을 해 낼 때 사람답다는 것이 깔려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육신이라는 모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들 사지 멀쩡하다고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정체성이 있다. 드라마 같은 것에서 보면 아버지의 눈 밖에 난 아들에 대해서 아버지는 "나는 아들이 없다"고 하기도 한다. 아직 멀쩡히 살아 있지만 아버지가 그리는 어떤 아들 상이 있는데 아들이 그렇지 못할 때, 아들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아버지의 마음에는 육신으로 아들이 살아 있어도 그 생각과 다른 아들은 아들이 아니며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도 육신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비로서 사람이 되고, 그 뿐 아니라 육신이 아무리 멀쩡하게 살아 숨 쉰다해도 그 정체성이 회복되지 않으면 죽은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천지창조의 과정이 지구과학적인 관점에서 이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고, 생물학적으로 생명의 기원이 무엇인지를 사람에게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이 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보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보실 때 비로서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정체성을 회복한 사람이 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이미지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육신의 모양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사진을 보면 그 속에 담긴 이미지를 알 수 있듯이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그런 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 것이고, 그것이 사람이고, 그것이 바로 이 천지창조의 과정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사진을 보면 그때 상황이 이미지로 전달이 되듯이 하나님의 이미지를 알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바로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사람을 <그리스도>라고 한다. 그래서 십자가 밑에 있던 백부장이 예수님을 보고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고, 한 사람이 그런 사람으로 조성되어져 가는 과정을 천지창조의 과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로운 세계이고, 그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그 세계를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대학에 입학함으로 대학이란 세계를 인지하듯이 말이다.


또한 이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사람만이 그 세계를 인지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세계를 인지할 수 있다는 것, 즉 그 사람의 가치 세계 안에 그러한 세계가 새롭게 창조 되었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한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세계가 창조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창세기의 시작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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