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세상을 말하고 그 안에서 복을 받아 생육하고 번성하는 생명이 이 세상의 법, 특히나 자본주의 세계에서 볼 때 부자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을 기준으로, 단지 그렇다는 것 만을 가지고 악하게 본다거나, 또 설사 그들이 부를 축적하는 과정이 편법과 불법으로 관철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을 그렇게 인정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고, 또한 내 마음 안에 어떤 것은 선한 것으로 어떤 것은 악한 것으로 여기는 기준이 없는 사람, 즉 선악과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경영하심을 알고 감사함으로 받으며, 세상의 죄악과 싸우는 것을 신앙인줄 알고 사는 삶을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바닷 속의 생명이 세상에서 세상의 법으로 성공하는 사람을 말한다면, 공중의 새는 신비한 것을 행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새는 사람이 볼 때, 그 정처와 근원을 알기 어렵고, 공중은 정확한 좌표나 기준이 없는 것을 날아 다닌다. 이는 때로 신비한 체험과 같은 일들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왕성하다는 것이다. 세상의 법에 따라 왕성해지는 바다 속의 생명이 있다면, 세상에는 신비한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 있고, 그 또한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날로 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주변에는 기도를 많이 해서 신비한 일을 경험했다는 사람이나, 또한 여름에 보는 납량 영화의 내용과 같은 일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한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에 대하여는 악하다고 비난하는 입장이라면, 신비한 일에 대하여는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왜 두려워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다. 마치 마귀가 권세를 줘서 세상 사람들이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듯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믿음이 깨어져서 생긴 일이다. 세상의 법으로 잘 되는 사람도, 신비한 일을 일으키는 사람도, 또한 마귀도, 세상의 법과 능력도 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천지창조의 다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바닷속의 생명과 공중 나는 새들을 복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신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이치의 깨달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감사로 이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그렇게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한 것이 아니라, 그런 과정에 있는 삶 안에는 감사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감사가 모여 있는 곳이 바로 에덴동산이다. 그래서 이 천지창조의 과정이 사람이 에덴 동산에서 창조되고 거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쉬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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