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을 보는 성경 속 두 번째 관점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다음에 아담이 보는 관점이다. 아담이라는 말의 뜻은 ‘붉다’이다. 이는 황토의 색에서 왔고, 사람이 흙에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핵심적인 것은 이 아담은 천지창조 시점에서 아담이라는 한 개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모습이다. 아담이라는 이름은 흙으로 지음 받은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이다. 이는 성경이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에서도 궤를 같이 한다.


아담은 곧 모든 인생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육신을 보는 관점은 단지 아담이라는 한 개인의 관점이 아니라 오고 가는 모든 인류의 관점이다. 즉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나면 육신을 어떻게 보는지를 아담이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아담이 육신을 보듯이 자신도 육신을 보고 있다면 그것은 선악과를 먹은 상태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선악과를 먹은 존재의 관점은 선악과와 하나가 된 관점이기 때문이다. 먹었다는 것은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자신이 거하는 육신을 어떻게 보았을까? 

그것은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아주 부끄럽게 여겼다. 그래서 숨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부끄러움을 아담이 하와 앞에 벗은 것을 부끄러워했다고 하지 않고 있다. 아담은 하나님을 피해 숨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 3:8)


심지어 아담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벗었다는 것이 두려운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아담이 말하고 있는 이 부끄러움과 두려움은 하나님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벗은 것이 부끄러워 보였다면 나뭇잎이든 무엇이든 몸을 가리는 것으로 족하였을 텐데 아담은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한 다음에도 하나님을 피해 숨어 있었다는 것은 단지 옷을 입었는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것에 있어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두려웠다는 것이다.


이로 볼 때 아담이 부끄러워한 벗은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드러났다는 것을 부끄러워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처음 창조되었을 때도 벌거벗은 상태였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드러났다는 것이 부끄러워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옷 입은 상태로 만들지 않으셨으니 하나님 앞에서 창조된 상태 그대로만 인정해도 부끄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런데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창조되었을 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는 것이다.


달라진 것은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뿐!!


아담이 처음과 달라진 것은 단지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뿐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육신이 달라진 것은 없다는 것이다. 하다 못해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두드러기조차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눈이 밝아졌다는 것이다. 눈이 밝아져서, 밝아진 눈으로 보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육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존재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눈이 밝아져서 발견한 단 하나의 인식이 다름이 아니라 육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존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만족하셨던 것에 정면으로 만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하나님과 사람이 관점을 달리한 것은 오직 하나 사람의 육신에 대한 관점 하나뿐이다. 그것 외에는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것이 없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점이 다른 유일한 것은 바로 육신을 가진 인생을 보는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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