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2장) 욥기를 통해 보는 사탄 – 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19. 2. 3. 23:00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에 맞서는 악함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함은 그에 앞서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이 그 사람 안에 있어야 선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이 있으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간첩이 아무리 선한 삶을 산다고 해도 어차피 간첩이듯, 사람이 제 아무리 사람들이 선히 여기는 일을 한다고 해도 지으신 이가 선히 여기는 존재가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행위를 보고 선과 악을 가늠합니다. 선과 악의 기준이 행동이나 그 결과에 있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모든 선과 악은 의에서 비롯됩니다. 국가라면 선하기만 하고 악하지 않은 것이 하나씩은 다 있습니다. 그것은 그 나라의 건국과 통치의 기본 이념입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인 국가도 있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인 국가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나라라도 그것을 악으로 보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 안에서의 모든 행위는 그 의를 기준으로 가늠합니다. 사람으로서 동일한 행동이지만 어느 나라의 국민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들이 넘치고도 넘칩니다. 그것은 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어떤 나라라도 그 나라의 건국과 통치 이념은 절대 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안다면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는 하나님은 절대로 악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경영하신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은 의지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 생명으로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 안에서 나야 하는 것입니다. 국민이 되는 가장 쉬운 방법이 그 나라의 의가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나는 것이듯 말입니다.


그와 같이 이 세상이 하나님의 세계라는 것이 자기 생명이 되어 거듭난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악할 수가 없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오직 하나님만이 선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에게 악함은 없다는 성경의 말씀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이 세상은 절대로 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경영이 악하다고 여기지 않는 이상 세상은 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법과 세계 안에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악하다고 말씀하시는 존재가 있는데 바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는 악(惡)이 없는데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이 악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의미가 자기 자리를 떠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악함이 없기에 그 안에 있다면 악함이 없는데, 그것을 벗어나면 악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국가의 이념은 악하지 않으므로 그 안에 있으면 악하지 않지만 그것에 반하면 악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람의 불순종


세상의 모든 만물들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의를 선택할 수 있게 두신 존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천사보다 사람이 낫다고 하시는 것의 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의를 선택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에서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하나님께서 선택의 여지를 두신 것이 없는데, 오직 사람에게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여지를 두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순이나 장난 혹은 사람을 향한 시험 같지만 사람은 자기가 선택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택할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옳다는 대로 선택할 것인지를 맡기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사회에서도 자발적인 것과 의도가 있는 것에 대한 극과 극의 차이를 느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누가 봐도 감동적인 헌신으로 대하기에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 줄로 알았는데 사랑이 아니라 돈과 같이 가진 것을 이용할 목적으로 그랬다는 것을 알면 말 그대로 천당에서 지옥으로 상황이 바뀌는 감정을 사람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에서 우리는 사람이 자의적이냐 아니냐의 절대성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다른 피조물을 만드실 때 단지 그들의 본성이나 유전적 세팅에 의하여 살기만 하고 하나님의 오묘함을 표현하기만 하는 모든 자연과 같이 사람도 나서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의만 표현하는 로봇이나 아바타와 같이 만들 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은 그와는 달리 자기 스스로 선택에 의하여 하나님의 의를 믿든지 아니면 자기 눈에 보이는 육신의 정욕을 좇아 살든지 선택할 수 있게 두신 것은 다 뜻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낼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성품을 표현한 세상의 모든 것을 보고 그것이 하나님의 의에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고백할 존재로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백하려면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없이 하나님의 형상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는 생명과 안목 없이 세상으로 표현된 하나님을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가진 기본적인 본성 안에는 하나님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라든가,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자의적인 줄 알았는데 의도적이었던 것을 싫어하는 것이라든가, 선함을 추구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 그것입니다. 다만 어떤 것에 대하여 그 성품을 표현하며, 무엇을 선으로 또 무엇을 악으로 표현할 것인지는 선택적으로 두신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선악과에 대한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을 단순히 식물의 열매로 보고 그것을 먹는지 먹지 않는지로 사람을 심판하신 것이라고 보면 모순적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는데 사람이 어기는 것이 그것뿐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불순종의 대표적 사건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행동 강령의 불순종으로 본다면 다시 사람이 하나님을 어기는 하나의 사례로 돌아갈 뿐 문제가 해결되지 않지만, 모든 사람에게 있지만 다양하지 않고 유일하게 공통적인 사람에게 있는 유일한 명(命) 곧 존재의 정체성을 순종하느냐 아니냐는 전혀 다른 문제인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과 종교학자, 신학자들이 성경을 행동의 강령으로 보거나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방법의 매뉴얼 정도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이 존재적인 관점에서의 불순종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존재에 대한 불순종이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죄의 개념에서부터 회복과 영생에 이르는 전반적인 개념의 근간이자 뿌리면 전부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러냐?’ 묻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으시는 주된 질문이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가 아니라 “네가 어디에 있느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인 것만 잘 알아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탄에 대한 이야기가 점점 길어지는군요. 다음 편에서 이 사람의 불순종이 사탄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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