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모습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의 모습은 아니다. 사람들은 신의 아들이라면 뭔가 일반인과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에서 ‘신의 아들’이라는 말이 가진 의미 중에 군에 가지 않은 남자를 말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엄청난 차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모습은 보통사람과 전혀 차별성이 없는 모습이었다. 차별이 있다면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못한 신분 곧 죄인의 신분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사형수. 한마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어떤 시각으로 봐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사람들이 가진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모습은 여느 인간, 모든 사람과 같은 모습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 물론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올 수도 없다.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기적이고 능력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면 거기서 내려오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건 고의로 그러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어야 하는 인간의 정체성이란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정체성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다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신 성품은 그런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기적을 나타내는 인간을 원하셨다면 이렇게 연약하게 창조하실 리가 없다.


사람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신비로운 능력을 가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물론 필요에 따라 그런 능력을 주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본연의 목적으로 수렴하기 위한 과정과 수단이지 사람이 기적을 일으키는 도구가 되는 것이 본질은 아니다.


이는 예수님의 삶을 봐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정작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밝히는 심문과정과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과정에서는 그것을 보이시지 않으셨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그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통하여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표현하시고자 만들지 않으셨다는 의미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설명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을 그렇게 표현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좋은 신앙과 훌륭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죄란 '자기 자리를 벗어난 것'이라고 성경이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자리는 공간이나 좌표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 자리는 정체성이다. 신분에 가깝다. 아들이라는 자리, 과장이라는 자리, 사장이라는 자리, 교사의 자리와 같은 자리를 말한다. 즉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분명한 한계를 두신 것이다.


사람은 날아다닐 수도 없고, 물속에서도 살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이 가진 가장 큰 한계는 자기의 생각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형식을 벗어나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한계를 벗을 수 없다는 것이고, 그것은 사람은 내용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내용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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