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10) 부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7. 22. 14:47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의 차별성을 가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차별성이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나 기독교인들이나 둘 다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 기독교가 더 우월하여 성공을 바라는 마음이 이루어질 확률이 높아지는 차별성과 경쟁력으로 해석되면 안 된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자가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것도 너무 놀랍고 중요한 것이지만, 더 핵심적은 것은 부활의 원인과 과정이다. 어떤 죽음을 당한 사람이 어떤 이유로 부활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부활의 핵심이다. 그냥 예수님을 믿는다고만 하면 그 믿음의 목적과 정체성에 무관하게 다 부활 신앙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믿음의 목적이 어떻게 다르겠는가? 다 구원이 아닌가?’ 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믿음의 목적이 같다면 교회가 왜 나누어지고, 교단은 왜 여러 개며 한 교회 안에서도 의견이 왜 다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목적이 같은데 다툴 이유가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부활할 수밖에 없는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아무 죽음이나 다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이유로 죽임을 당한 사람이어야 부활을 맛보는 것이지, 믿음의 목적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하고자 하신 것과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살다가 죽은 사람에게 부활은 없는 것이다. 그가 아무리 “주여! 주여!” 외치고, 주의 이름으로 이 땅에서 랜드 마크에 해당하는 큰 교회를 일구었거나, 또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고 해도 미안하지만 부활은 없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성경을 제대로 보면 그럴 수 없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중에서 살리시는 것은 죽기 전과 같은 삶을 살기를 바라심으로 다시 살리시는 것이 아니다. 부활신앙을 가지기 전이나 가진 다음이나 믿음의 정체성이 같다면 굳이 살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부활 신앙 이전에도 하나님께 먹을 것 마실 것을 구했는데 부활한 다음에도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구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사람은 다시 살아났을 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목적이 이루어진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살리시는 것이지, 교회에 가서 세상사는 문제를 구하는 것에 있어 부활 신앙을 믿으면 더 잘 이루어주신다는 생각으로 레벨 업 하듯 부활신앙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죽음을 당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살리셨는가를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중에서 살리신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이전의 어떤 죽음 하나와도 같지 않은 전혀 다른 죽음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장사된 바 없는 묘실에 장사되었다고 하신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 안에서 살다가 죽은 죽음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이유는 없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라고 육신을 가진 인생을 주었더니 그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 생각하고 소유와 공로에 대하여 소망하고 그것을 추구하며 살다 죽은 사람, 하나님의 의를 나누는 공동체로서 교회를 주셨는데 세상의 가치관대로 성공한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이유가 있는 삶도 죽음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살리실 수밖에 없는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죽으신 죽음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을 이유가 없는 죽음이라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진정으로 산 것이고 생명이 있는 모습이었기에 예수님께서 그 죽음 가운데 행여 있으려 해도 있을 수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순리대로 살리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산 것으로 보시고 또 무엇을 죽은 것으로 보시는 지와 상관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것이면 자신의 육신이 살았다고 해도 죽은 것이고, 하나님이 보실 때 생명이 있고 살았다 할 수 있는 것은 육신이 죽여도 하나님은 살리시고 생명으로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 안에 사람이 있으면 그 육신이 죽어도 산 것이고, 살아서 믿는다면 영원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 안에서 사람이 살면 그 사람이 어떤 죽음을 당하든지 산 것이고, 사람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을 벗어났다면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믿노라 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목숨을 드려서 지켰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다. 그들의 그 삶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 안에 있는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살았다고 하나 오히려 죽은 것이고, 예수님은 죽였지만 살아나시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리신 그 죽음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볼 때는 죽어야 하는 것이고, 또 그들 눈에 예수님은 죽은 것으로 보였지만 실상은 그들이 바로 회칠한 무덤과 같이 몸은 살았으나 죽은 자들이고, 하나님이 보실 때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이 진정으로 생명이 있고 살아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부활은 퍼포먼스가 아니라 숙명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죽은 것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산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이 죽음은 살아야 하는 것이고 생명이 있는 것임을 표현하시니 육신이 부활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아무 죽음이나 부활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과 같은 죽음을 당한 사람이어야 누리는 은혜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앞에서 너무나 많이 이야기했듯 세상의 가치관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고 죽여 버린 사건이 바로 십자가다.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저런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라는 심판에 의하여 죽으신 것이다.


이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아들이란?>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는 언제나 죄인이 되는 존재며, 그래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죽게 되는 사람이다. 바로 그런 죽음, 하나님의 의가 심령에 생명으로 있는 사람인데 세상의 가치관으로 죽을 죄인이 되어 죽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바로 그런 죽음,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가 육신의 삶으로 나타난 하나님 아들의 삶을 사는데 세상의 가치관으로 패자가 되고 죄인이 된 사람의 존재 정체성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죽은 것 같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형상이고 성품이기에 그 사람을 살리시는 것, 그것이 부활인 것이다.


하나님이 나타내시고자 하신 것이 바로 십자가의 일이라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존재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같이 부끄럽고 하찮은 존재이기에 끊임없이 연단하고 절제하고 금욕해야 하나님의 의에 이를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그 하찮은 인생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에 너무 좋은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좋은가 하면,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리시니 너무 쉽게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더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본다는 것은 아버지인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존재는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될 때 하나님의 형상과 이미지와 성품을 나타내는 하나님 아들로서 드러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니 당연히 사람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언제나 죄인이고 부끄럽고 연약한 이 모습은 언제나 세상 앞에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될 때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도록 지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다.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고자 하신 것이 목적이고, 그 목적이 나타나는 조건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사람을 평가하면 죄인이 되는 상황ㅇ이 조성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대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바로 그런 죽음을 당한 사람, 사람이란 그런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사람인 자신도 그것이 자기의 운명이고 존재하는 목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계획인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는 죄인이 된다는 것을 알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군사를 불러서 자신을 붙잡으러 온 군사를 물리칠 권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정체성은 그럴 수밖에 없기에 그렇게 하신 것이듯,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고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라 가려는 사람도 그와 같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죽는 죽음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살았다고 하시고 그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는 것이 부활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죽음이 아닌 다른 죽음을 당한 이는 하나님의 부활을 맛볼 수 없다. 세상의 가치관이 자신을 심판할 때에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그런다’고 “사탄아 물러가라!”는 식의 반응을 하고, 영화 <밀양>에서와 같이 하나님께 용서 받았으니 세상에 사과할 것이 없다는 식으로 세상이 자신을 심판하는 것에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 죽음을 당한 자는 십자가의 부활이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죽음이 십자가의 죽음이 아닌데 어떻게 십자가의 부활이 있겠는가?


부활은 모든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니다. 부활은 어떤 죽음에 있어 다시 사는 것이다. 그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이다. 그 죽음은 세상의 가치관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삶을 심판할 때에 그것에 자신을 내어주는 죽음이다. 세상이 교회를 비난할 때 맞서는 것이 하나님의 군사로서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은 신앙은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니 부활도 없는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부활신앙을 가졌다고 신념을 다해서 믿으려 애써도 헛힘 쓰는 것일 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을 당한 하나님 아들을 살리시는 일이다. 살리심도 퍼포먼스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을 가지셨기에 하늘의 군사로 십자가를 물리치시지 않음과 같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과 의 안에서는 십자가의 죽음만이 산 것이고 생명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바로 십자가와 같이 세상의 가치관이 하나님이 선히 여기신 창조물인 사람을 심판할 때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이 나타나도록 지으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만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사람이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십자가의 죽음이 없다면 부활은 절대로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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