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9:38-42) 무덤에 누우시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7. 21. 10:45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그 제자(12제자가 아닌 제자)인 아리마데 요셉이라는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자기가 안치하겠다고 하여 예수님의 시체를 자신의 묘실에 장례하였다. 당시 유대인들 중에 여력이 되는 사람들은 바위 산 기슭 등에 굴을 파서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 많은 경우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자기가 묻힐 무덤을 미리 만들어 두기도 했다고 한다.


예수님의 제자라 하면 보통 12제자 그리고 또 70인 등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다. 다만 그 시절은 지금과는 달라서 종교가 곧 삶의 근간이었기 때문에 이교도에게는 돈을 줘도 물건을 팔지 않는 그런 시대였다. 그래서 자기가 속한 나라와 사회에서 같은 민족이고 국민인데 다른 종교를 가져서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하지 못한 이들이 많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예수님과 당당하게 함께 했던 제자들의 믿음은 상당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리마대 요셉은 나름 부자였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묘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나름 살만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잠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예언한 이사야서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강도와 함께 죽으시고 또 부자의 묘에 장사된다는 것이 예언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사 53:9)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신 적이 있다. 회칠을 했다는 것은 화려하고 아름답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무덤이라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의 행위는 율법을 잘 지키는 것과 같이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그 속은 죽은 상태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죽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사람은 육신이 숨을 쉰다고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람이 살고 있으면 산 것이고 그것이 아니면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은 속사람이 생명이 있어 그 생명이 본성대로 움직이는 움직임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 어떤 행동을 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말씀과 율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으로 아무리 경건하고 말씀을 다 외우고 행위로 율법을 지켜낸다고 해도(물로 그럴 수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여기시는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 생명의 활동으로 인하여 살았더니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지키고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되신 것은 다르다. 바리새인들을 무덤에 비유하신 것은 그들은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이 죽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고,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되신 것은 유대인들과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예수님은 그 가치관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 즉 시간이 맞지 않는 시계와 같이 세상에서 요구하는 사람의 존재 목적으로 볼 때 죽은 자와 같고, 죽어야 하는 존재로 보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고, 또 예수님을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고, 신 포도주로 대접하고 급기야 죽여서 무덤에 장사지내게 한 것이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이전에 사람이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에 장사되셨다고 하였는데, 이는 예수님의 이러한 죽음은 이전에 세상에 없던 죽음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 이전의 모든 죽음과 다르게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어 죽으신 죽음이기 때문이다.


많은 신앙인들은 자신이 가진 하나님의 의가 훼손당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 아니 그것을 참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이 지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나님인 양 자기들의 가치기준으로 예수님을 심판하여 십자가에 못 박는 죽음을 순종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훼손되는 정도가 아니라 죽이려 하는데 죽으신 것이다. 이것만 알아도 지금 많은 교회들과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간다고 말은 하지만 십자가가 뭔지도 모르고 자기 신앙, 자기 의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누우신 것은 세상의 가치관이 예수님을 죽어야 할 자, 죽은 자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높아져서 의로워지는 세계인데 예수님은 낮아져서 의로워지고, 세상은 행위와 소유로 이긴 자가 되는데 예수님께서 존재로 이긴 자가 되시는 분이시니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전혀 살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존재의 법으로 생명과 죽음을 가늠하시는 분이시고 세상은 소유와 공로로 생명과 죽음을 가늠한다. 하나님의 존재의 법으로 선함과 악함이 구분하시고, 세상은 소유와 공로에 있어 더 많이 가지고, 더 능력이 있으면 높은 자리 곧 선하다고 인정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품성에 따라 존재로서 하나님을 표현하였더니 세상의 가치관은 그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고 오히려 세상을 미혹케 한다고 여겨 죽여서 무덤에 장사지내게 만든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예수님은 죽어야 하는 존재이기에 무덤에 장사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덤에 머무를 수 없었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죽으신 것이지 하나님의 법으로는 무덤에 머무실 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것이다. 부활은 놀라운 기적이지만 사실 필연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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