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오는 것은 그 의미가 있다. 피는 생명과 같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뼈는 의를 나타낸다. 덧붙이자면 그래서 뿔도 의를 나타낸다. 뿔은 뼈가 밖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의는 내용이다. 보이는 것, 나타난 것, 또 사람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나 만들어 내는 것 그 모든 것은 사람 안에 있는 의가 밖으로 표현된 것이다. 즉 의는 모든 표현된 세계의 근원이고 아버지와 같은 것이 바로 의다. 에스겔서에서 뼈가 군대가 되는 말씀도 결국 의가 있으면 살이 붙어 군대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죄수는 쉽게 죽지 않았다. 십자가형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말라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며칠 동안 살아 있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죄수가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또 죽음을 당기기 위해서 뼈를 꺾었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한 두 강도의 다리는 꺾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때 운명하신 것을 확인하고는 뼈를 꺾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와 뜻을 전하시기 위하여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 아들 예수가 사형수가 되어 죽어가는 순간을 사실적으로 전하기 위하여 이런 말씀을 남기신 것은 아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게 되었지만 의도하심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뼈가 꺾이지 않으신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심이 육신이 상한 것이지 의가 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형까지는 당하지 않아도 되셨다. 예수님을 죽이고자 송사하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심문할 때에 고발하는 자들의 고발이라는 것이 고작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면 사흘에 다시 짓는다고 했다는 것들에 불과했다. 그건 로마의 총독이 볼 때는 그냥 사기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사기로 나라를 팔 것이 아니라면야 그 정도로 사람을 죽이는 경우는 잘 없다. 그러니까 그런 것으로 예수님께서 죽으실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심문을 받으실 동안에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고발에서는 아무 답변도 않으셨고, 오히려 괜히 예수님을 치는 자에게 치는 이유가 무엇인지 반문하실 정도로 떳떳했다. 그런데 단 하나, “네가 찬송 받으실 분의 아들이냐?”라고 했을 때 그 질문에 답을 하신 것이다.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그것이 결정적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심문하는 유대인들의 가치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과 같은 신분과 죄인들과 어울리는 행실과 율법을 어기는 상태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럴리는 없지만 만약 예수님께서 그 질문에 마저 침묵하셨다면 십자가에 달리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못 참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실수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의, 자기 육신의 근원인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하나님께서 자신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는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아들이라는 그 하나님의 의는 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된 육신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이를 정리해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가 꺾이지 않으셨기에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십자가에서 의가 꺾이실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죽으셨으니 뼈를 꺾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인하여 죽으심이 바로 의를 보존하시는 역사하심인데 그 뼈가 꺾이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니 예수님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예수님의 육신이 죽으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육신을 어떻게 쓰다가 하나님께 갈 것인지를 설명하시는 것이다.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육신은 언제나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리는 죄인이 되는 존재다. 언제나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시는 하나님의 의인데 그것이 꺾일 리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뼈는 예수님의 의를 의미한다. 굳이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도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예수님이시다보니 그 의에 대하여는 굽히지 않으신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 되어 심문을 받고 있는 육신을 가진 인생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전하러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육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감추지 않으신 것이다. 즉 의가 꺾이지 않으신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하나님의 아들은 고사하고 동네 이장 아들도 못될 것 같은 그런 모습을 한 것 같은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념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생명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는 언제나 죄인이고, 또 십자가를 진 것 같은 삶이지만, 그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살 때는 그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느라 육신이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이때는 신념 같은 것 필요 없다. 그냥 그렇게 된다. 그 하나님의 의는 우리 육신이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죽은 자와 같이 되어도 꺾이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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