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유명한 전신갑주는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별개의 것이 아니듯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생명 세계의 일입니다. 한 생명이 보이는 여러 가지 모습과 행동이 독립된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의 본성에 귀속된 것이듯 성령의 9가지 열매도 말 그대로 열매입니다. 성령이라는 생명이 맺는 열매인 것입니다. 그와 같이 전신갑주 역시 단계적으로 갖추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사도의 시그니쳐와 같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이 모든 것은 다 갖추어진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전신갑주를 시작할 때에 ‘서서(stand)’라고 하였습니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거나 생명 혹은 의식이 없으면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섰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의에 속한 사람, 하나님 기준으로 볼 때 생명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보여주는 각양의 성향을 차례로 보여주는 것이 이 전신갑주인 것입니다. 아니 알고 보면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렇습니다.


진리와 의에 속한 사람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평안함을 가지고 있다고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가 온전한 생명이 되면, 모든 생명이 그러하듯 그 생명을 발산하고, 또 같은 생명을 찾고 또 그 생명이 계속 세대를 이어가도록 헌신합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우리가 흔히 전도라고 하는 것은 바로 생명이 가진 종족보존의 본능에 비길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와 의가 온전한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와 의를 전하는 것이 예비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예비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긴 여정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평안의 신을 신으라고 한 것에서 이것이 긴 여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육신적으로도 신은 편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고급스러움이 우선될 수 있을지 몰라도 신발만큼은 편함이 우선입니다. 이는 복음을 전하는 여정은 평안 없이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평안은 세상에서 말하는 평안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러 가시면서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평안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또한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평안은 육신의 평안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평안은 존재 정체성의 안정성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 아들이라는 존재의 정체성이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안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평안은 어느 날 존재하고 있음은 알게 되었지만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진 불안을 떨칠 수 없는 것입니다. 존재하게 된 이유를 모르니 이 존재가 끝나는 사후의 세계가 그렇게 불안한 것입니다.


이 평안이 복음을 전하는 거서에 절대적인 것은 자신의 존재 정체성이 불분명한데 다른 사람에게 존재의 의미를 일깨울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많은 설교자들이 인생의 존재 목적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평안하게 살 것인지를 설교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재의 목적을 아는 생명을 가졌다면 당연히 생명의 본능을 좇아 그것을 전하겠지만 생명이 없으니 그것을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잘하라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전신갑주의 시작에서 이것이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평안이라는 것이 육신의 평안이 아니라고 시작할 때 분명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와 의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은 그 진리가 우리의 존재 정체성에 대한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의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안정성이 없으면 자유도 평안도 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오히려 육신을 곤고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육신이 어딜 봐서 평안했습니까? 바울사도는? 베드로는? 그 예수님을 믿고 그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믿으면서 예수님을 믿어서 육신이 평안해지겠다고 기도하고 교회가 시키는 대로 행하려 노력하는 것은 도무지 어떤 사고방식에서 나오는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은 한 마디로 사망과 어두움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육신을 끊임없이 소비하고 소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으로 몸소 오셨고, 바울사도도 자동차도 없는 시절 온 유라시아를 몸소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떤 사도도 ‘내게 복음이 있으니 듣고 싶으면 네가 와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복음을 가진 자가 종과 같이 수고하고 육신을 소비하는 세계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린 이유인 것입니다.


그런 육신의 수고로움의 삶에 자기 정체성의 안정성이 주는 평안이 없으면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수고하여 복음을 전하러 갔는데 멸시를 받는다면 누구라도 스스로 앉아서 ‘내가 뭐한다고 이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라고 한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욥이 바로 그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으로 끊임없이 수고하고,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종이 되는 세상이 볼 때 조롱거리 같은 삶을 사는데 그 삶에 대한 정체성이 평안을 줄 수 없다면 가능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데 아버지의 일에 목숨을 걸 수는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평안의 신 역시 하나님께서 자신을 존재하게 하신 의와 뜻을 분명하게 아는 것에 귀속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자기 육신의 삶이 된 하나님께서 생명 있는 존재가 되어야만 신을 수 있는 신입니다. 이것은 그런 생명이 되라는 말씀이지 어디 가서 그 신을 찾아 신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평안이 없다면 당연히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예비 되지도 않은 것입니다. 생명을 번성케하려면 먼저 생명이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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