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그리스도의 직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3. 12. 16. 18:56 Writer : 김홍덕

아담이 동물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책무라 할까? 본분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논리적 근거가 없는 비약을 볼 수도 있겠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인생들에게 의미를 부여하시는 일을 하셨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름을 불러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름+정체성>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정체성을 일깨워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깨우신 인간의 정체성은, 사람이 노력하고 치장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연약함을 가진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직접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그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의 사람들의 생각과 같이 선하고 도덕적인 분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의 관점에서 봐도 동일하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유대인들의 지도층인 바리새인, 제사장, 서기관 등 그 시대의 지금의 목사나 교수나 선생과 같은 사람들이 볼 때, 형편없는 사람이었다.


세금을 제대로 내기를 하나, 사회 지도층 인사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욕하질 않나, 성전에 가서는 상을 뒤엎지를 않나, 쉬라는 안식일에는 남의 밀 밭에서 밀을 까 드시질 않나, 뭐 하나 당시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여기는 모든 것에 시비를 걸듯하신 분이다. 


그렇다고 그 당시 지도층인 바리새인들이 나쁜 사람들이었는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이 시대의 지도층과 비교할수도 없을 정도로 그 나라의 가치관 안에서 훌륭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도전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간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을 바로 하는 것이고, 그것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신 것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일탈"같은 생각과 행동이 다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일탈을 하신 것이 아니다. 인간의 정체성을 보이셨는데, 그것이 사람들이 가진 인간의 정체성,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스스로 정의 내린 인간의 정체성에 반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일탈로 보였고, 그들에겐 일탈 이상으로 죽일 수 밖에 없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은 다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사람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정체성이 행위로 도덕적이고, 율법을 잘 지키고, 하나님께 어떻게, 또 무엇을 하고 드리느냐? 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첫번째 아담은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이고, 두번째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다. 아담은 '붉다'는 의미고, <사람>이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신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 둘 다 없었던 존재가 존재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Rome Chapelle Sixtine vintage
Rome Chapelle Sixtine vintage by Grégory Cassiau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그 예수님의 존재, 이 땅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의 모습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그 사실, 그것은 사람으로 사는 존재들에게 그 정체성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업무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듣고 자기를 알게 될 때,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천지창조를 맛보게 되는 것이고, 그 내용이 바로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다는 것이고, 그 직임이 또한 그렇게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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