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21장)


베드로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믿었지만 그리스도라는 존재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십자가를 지는 본성을 가졌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나눈 베드로의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와 다른 그리스도를 사랑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해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의미다. 성경에 예수님의 일을 기록한 것이 그와 동일한 생명으로 사는 것을 위함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우리도 그와 같은 여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대화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과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세 번에 걸쳐 같아 보이는 대답을 하는 대화가 그것이다. 이 대화 중 예수님의 첫 번째, 두 번째 질문 속 ‘사랑’은 아가페(Agape)의 사랑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질문 속 ‘사랑’은 Phillia 곧 형제간의 사랑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말하는 모든 사랑 역시 Phillia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Agape)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Phillia)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Agape)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Phillia)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Phillia)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Phillia)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21:15-17)


여기서 한 가지 하나님의 사랑은 흔히 무조건적인 사랑 아가페라고 한다. 장사하듯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며, 하나님의 관점과 성품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이 그런 의미다. 먼저 사랑하는 존재는 받은 것이 없으니 당연히 무조건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기에 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말씀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신다는 말씀은 동일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창조하셨다는 것은 창조의 목적이 있다는 의미다. 피조물인 사람의 존재 목적을 하나님이 가지셨다는 말이다. 당연히 그 목적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관한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가지고서 사람에게 부여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시겠다는 사람 창조의 목적이 바로 하나님 사랑의 본질이다. 


따라서 사랑이라는 것은 의미 있는 관계 속에 있다. 세상에 남녀가 각각 반이지만 그 중에서 사랑하는 한 남자, 한 여자는 나에게 의미 있는 한 남자, 한 여자라는 의미다. 의미 없는 관계에 사랑은 없다. 즉 존재로서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주고, 또 나의 삶의 의미가 되어주는 것이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나에게 의미가 되는 것, 하나님의 의가 나의 의미가 되는 것, 삶의 의미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졌다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한다는 것은 사람 창조 목적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이라는 의미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 했느냐?”고 물으신 것은 “내가 너에게 하나님의 관점과 마음으로 의미가 있었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이에 베드로는 필리아(Phillia, 동료애)였다는 것을 주님이 아신다고 답을 했다. 그것은 자신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지 않았다는 고백이고 시인이다. 두 번에 걸친 동일한 질문과 대답 이후에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그러면 네가 나를 Phillia의 사랑으로 했느냐?”고 물으신다. 마치 금도끼 은도끼에 나오는 산신령이 착한 나무꾼에게 묻듯. 베드로는 그 질문에도 자신이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라 사람의 기준으로 보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한다.


그 솔직한 고백에 대하여 예수님은 만족하셨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이제 예수님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안목이 같아진다는 것이다. 물론 베드로의 안목이 예수님과 완전히 동일하게 되는 것은 오순절이 되어서지만 적어도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심문받으시는 뜰에서 매 맞는 예수님이 누군지 몰랐던 것은 자신이 예수님과 안목과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달라서 그랬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항상 그렇듯, 자신을 고백하고 시인하는 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전부고 시작이다. 나머지는 성령이 오셔야 한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오시므로 베드로와 제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이 완성된다.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하신 대로 된 것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이 모든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말씀이다. 이미 목욕한 자요, 온전케 된 자에 속하는 베드로와 10제자들에게 열리지 않았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일깨우시는 대화가 갈릴리 바닷가의 대화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를 간절하게 설명하시고 계신다. 십자가를 지고 낮아지는 본성을 가진 존재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이렇게 간절하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약속하신대로 성령이 오셔서 이를 완성한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시듯, 제자들 그리고 제자들과 같이 보잘 것 없을지라도 육신을 가진 존재라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순종하므로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모든 자들에게 성령이 오셔서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사는 존재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잉태케 하신다. 우리가 육신으로 사는 삶을 부여 받은 것은 바로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낮아지므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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