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지를 자문하듯 하던 미가 선지자의 말씀은 악인의 삶이 어떠할 것인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개는 보통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다소 부자연스럽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것은 악인의 삶이 어떻게 피폐할 것인지, 부정한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저주를 받을 것인지에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 정의와 연결해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가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6장의 말씀은 ‘하나님을 무엇을 드릴까?’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을 순종하는 것이 본질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어떤 행위의 공로를 드려야 하는지를 궁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기에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 완전한 지혜라는 말씀을 하심이 그것입니다.


미가 선지자가 아니 성경의 모든 말씀이 가진 본질적 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꾸 뭔가를 하려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가만히 서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또 나를 만드신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먼저며 본질이며 그것을 자기의 존재 정체성으로, 삶의 이유와 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순종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완전한 지혜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말씀에 이어서 악한 자, 부정한 에바(저울이나 기준)를 사용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이 말씀이 왜 나왔는지는 생각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회 정의적인 관점에서 보게 되는 모습에 이상함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앞서 이야기한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어떤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래, 부정한 저울을 사용해서 부정한 재물을 모으면 안 되지!’라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은 어떤 행위가 논점이 아니라, 그런 행위들이 바로 완전한 지혜인 하나님의 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자기 안에 없기 때문에 표현된 것이라는 것임이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람들의 행위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행위의 어떠함이 그 사람이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 판단하는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준은 오히려 사람을 혼돈스럽게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를 지키는 자국의 군인은 적국의 군인을 많이 죽여야 합니다. 순식간에 행위가 기준인 가치관을 흔들어 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법과 가치관이 여기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사회는 늘 불공정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회와 세상이 불공정한 것은 존재의 하나님께서 만든 세상을 행위적 관점으로 보고 그 기초 위에 법과 가치관이 세워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이 행위가 아니라 그 사람의 본질을 본다면 많은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사람을 믿는 것도 달라질 것입니다. 예를 들면 스포츠를 보고, 그 경기 결과에 대한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사람들의 가치관이 얼마나 행위에 매몰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경기에 이기지 못하고 좋은 경기력을 보이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수준이 가히 참혹합니다. 


사람들이 그런 악함을 보이는 것은 가치관을 인함입니다. “프로 선수가 밥 먹고 저것만 하는데 저걸 못하냐?”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을 안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프로 선수는 누구나 이기고 싶어 하고 그것을 위해서 사력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만 인정해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선수가 말 그대로 “밥 먹고 그것만 해도 잘 안 되는 것이 프로 스포츠구나!”라고 생각하고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사람의 행위는 그 심령이 어떠함에 따라 결정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가 선지자가 말씀하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부정과 악함은 그 행위가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함을 인하여 발생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을 아는 완전한 지혜가 없기에 악한 행위를 하고, 또 그것을 구분도 못하고 그런 악한 <행동>을 어떻게 제어할지나 고민하는 답 없는 순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존재의 하나님께서 그 존재의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창조하신 세상과 사람이 그 목적을 알고 존재적인 관점을 가지지 못하므로 지혜가 완전하지 못하며,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 갈 때도 ‘무엇을 가지고 갈까?’, ‘무엇을 행할까?’를 고민하는 그 연장선에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악하다고 하시는 모든 것이 나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정한 저울이 악함의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뜻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저울>로 부정한 재물을 축적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특히 자칭 하나님을 믿는다는 기독교인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만 알면 도둑질을 해도 되느냐고 반문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기만 하면 그 사람이 스스로 어떤 행동을 함에 있어 절제하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느냐고 묻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분명히 미가의 말씀이나 선지자들의 외침 속에 있는 악함을 행위 기반으로 볼 것입니다. 이는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만 하면 도둑질을 해도 되냐고 묻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신학박사고 장로고 목사며 기독교인으로서 세상에서 청렴하고 성공한 사람이라도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다면 미안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본성으로 있고, 그 본성으로 인하여 살아가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살아가는 것인데, 그런 삶이 도둑질을 하게 한다면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 안에 도둑의 본성이 있다는 이야기 밖에 더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을 넘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분노가 있는 것임은 아마 꿈에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악함을 볼 때 그 말씀들이 사람들의 행위를 기반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니 알아야겠다고 노력해서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방법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어떤 수고와 노력과 방법으로 그렇게 되는지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시키는 것에 순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또 사람을 지으신 뜻을 하나님이 만든 한 사람으로서 자기 삶의 운명과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순종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될 것인지를 생각하고 그것에 대하여 여전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자기 삶의 존재 목적과 의미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본질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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