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때가 되었으니 이제 자고, 쉬라’고 하시고 또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리라’하시면서 가자고 하시면서 동산을 떠나자고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위해 군병들과 함께 와서 예수님을 넘기려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시니 군병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했고, 이때 제자 중의 한명 곧 베드로가 칼을 휘둘러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라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그 종의 귀를 치유하시고 베드로에게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

라고 하시면서 베드로를 꾸짖으셨다.(상황의 설명은 요한복음이 더 상세함)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만약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 26:54)

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과 모습은 많은 설교의 제목이 되고, 또 많이 알고 있는 말씀이다. 하지만 이 말씀의 본질을 정말로 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정말로 많이 달랐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이 모습과 말씀을 그렇게 연구하고 또 설교하고 묵상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보이시는 이 모습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이 없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을 보이심이고, 그것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말씀과 모습을 바로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 관해서 지지 않으려 한다. 신앙에 있어서도 지지 않으려 한다. 신앙인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신앙에 관해서는 절대로 굽히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들은 신학생들의 데모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데모라고 말하기도 한다.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이라 자칭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위한 데모를 하니 목숨도 하찮게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많은 설교를 통해서 칼을 휘두르는 것과 같이 살지 말자와 같은 말은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순순히 잡혀가시는 모습의 의미를 잘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말씀이 어디를 봐서 칼을 휘두르지 말라는 말씀이 주제이겠는가?


많은 신앙인들이 정말로 착각하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바로 신앙을 지키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신앙인들은 누가 하나님을 욕하면 욱하고, 교회를 비판하면 대항하며, 자신들의 신앙과 다른 것을 주장하는 사회의 단면에 크게 반대의 목소리를 내면서 신앙의 의를 부각시키는 것이 신앙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들 살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건 아마 배우기를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가르쳤다는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잡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어주시고 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에 비하여 하나님과 기독교 신앙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 믿는 신앙을 무시하거나 모독하는 것이 정말로 큰일일까? 그건 확실히 아니다. 그것이 더 큰일이라고 한다면 성경과 신앙에 대하여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때고 지금이고 예수님보다 하나님에 대하여 더 확실히 알고 있는 이가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더 잘 나타낼 이가 없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있을 수 없는 분이시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예수님께서 지금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잡혀가시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끌려가시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그런 상황을 모면할 방법이 없으신 것도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하늘의 천사를 불러서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을 물리치는 것은 정말로 일도 아닌 것인데 그냥 끌려가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제자가 되겠다며 훈련하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대하여 몰라서, 또 하나님을 몰라서 기독교 신앙에 반하는 삶을 사는 이들을 책망하듯이, 또 여론이나 교세의 세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셔야 선지자들의 글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셨다. 선지자의 글이 무엇인가? 모든 선지자의 글은 오실 메시아 곧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잡혀가시지 않고 하나님을 모르고 죄를 범하는 군인들과 제사장의 하속들을 심판하듯 하시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천(a christ) 역시 예수님과 같지 않고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비방하고 죄를 짓는 이들을 심판하고 대적하고 물리치려 하고 사회적 여론이나 세를 이용하여 강제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씀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예수님을 말씀을 읽고 듣고 교훈 삼고자 하는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이 없는 이들의 삶에 대하여 때로 그것이 예수님을 결박하듯 신앙을 침해하고 제한하는 상황을 직면했을 때, ‘사탄아 물러가라!’며 쇳소리 내거나, 서울역 광장에 모여서 집회를 하거나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일로 인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그들의 무지를 지고, 또 제한에 얽매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복음 전하는 일에 매진하다 보니 가정의 경제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었다. 그러자 부인이 견디다 못해 그런 상황에 대하여 불평도 했고 때로는 소위 말하는 바가지를 긁기도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부인이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때로는 부인이 없는 자리에서 다른 교인들에게 자기 부인이 신앙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어쩌면 흔한 상황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은 베드로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칼을 휘둘러 종의 귀를 자른 것이나, 부인을 비난한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바로 많은 신앙인들 특히 열성 넘치는 이들이 범하는 신앙적 오류인 것이다.


사람이 육신을 가졌기 때문이 두 가지를 잘 하기 어렵다.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남들 일하는 시간에 교회 일을 돌보고, 또 복음에 관한 일을 하노라면 당연히 경제적인 경쟁력이 약해질 것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때로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왜 자신을 돌아보지 않느냐며 한탄하거나 심지어 사회적으로 무리수를 두게 되면 방송에 나오는 사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배운다면, 교회 일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다보니 가정을 돌보지 못하여 받는 아내의 불평은 당연한 것으로 알아야 하고, 오히려 그 아내 앞에 죄인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유대인의 법 앞에 예수님이 죄인이었듯, 아내의 법 앞에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건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문제를 자신이 안고 가야하고 또한 해결하기 위하여 수고해야 하는 것이다. 부요하게 사는 것이 금방은 어렵더라도 불평을 해소하기 위하여 몸소 수고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사람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고, 신앙인들이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신앙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는 바로 그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을 가졌기에 신앙 없는 이들을 보고 신앙 없다고 비난하고, 책망하고, 대항하고 내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없는 그 법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듯 죄인이 되어 오히려 그들이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눈으로 보고 그 본 것이 자기 마음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감동이 되도록 수고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이고, 그런 삶을 우리에게 전하신 것이 예수님의 삶이다.


그렇게 하면 우선 엄청 어려울 것 같다. 사실 어렵다. 만약에 그렇게 해야 그리스도인의 삶이니까 그렇게 살자고 마음먹고, 신념을 가지고 노력해 본다면 정말로 어려울 것이다. 성경을 읽고 그대로 살아보려고 하는 것이 힘든 이유도 같다. 하지만 누군가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고 자기 마음이 감동이 되어 그 마음 안에 그렇게 살고자 하는 생명이 잉태되고 그 생명의 본성이 자신의 삶이 되면 그것은 오히려 금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볼 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죄인이 되어 달리신 모습이, 오늘 자신에게 신앙이 없는 사람, 자신보다 세상의 지식과 능력에 대하여 부족한 이를 책망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듯 짐 진 듯 수고하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 하심이라는 것을 그 심령 안에서 깨닫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깨달음을 주시는 분이 성령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를 가지시고, 그 의와 말씀이 예수님으로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그 의를 십자가에서 보이시고, 그 십자가를 볼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우리의 본질과 정체성과 존재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지 감동으로 깨닫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하나가 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그리스도인이요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삼위일체고, 그것이 성경의 모든 역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신앙 없는 이들을 심판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신앙의 문제만이 아니다. 어떤 지식과 업무와 능력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그 어떤 것이라도 사람의 삶이라면 다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직 심령 안에서 그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이 깨달아진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어 본성으로 표현되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삶의 모든 것에 그 모습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이 되었다면, 삶이, 그 사람의 주변이 시끄러울 수 있겠는가? 이것이 예수님께서 선지자의 글을 이루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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