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유월절 만찬을 가진 그날 밤에 너희 모두가 나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그러자 베드로 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을 한다. 하지만 이미 예수님께서는 만찬에서 누군가 배신할 것이라 하자 모두들 자신인가 궁금해 한 것에서 보듯이 다들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요한복음 17장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돌 던질만한 정도 떨어진 곳에서 기도하셨고, 요한도 졸고 있었는데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과 같이 그렇게 상세히 기도 내용을 기록했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그것을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요한이 예수님께서 가신 이후에 자기 마음 안에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마음과 같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기도를 적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면서 들은 것을 그렇게 기억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 17장, 아니 요한복음 13장에서 17장까지는 읽노라면 소름이 돋는 그런 말씀이다. 그런 방대하고 놀라운 내용을 마태복음의 순서에 따르면 26장 35절과 36절 사이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잠시 요한복음 14장의 시작을 보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라는 말씀이다. 모두가 배반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 앞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근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생업을 버려두고 좇았던 스승이고 주님으로 여긴 분이 그렇게 따랐던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버릴 것이라.’하는데 이것이 근심하지 않을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더욱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버릴 것임을 알면서 그들에게 나를 믿으라고 하는 것이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이제 곧 다 버리고 도망가 버릴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너희는 나보다 큰일을 할 것이라고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신다. 이러한 것을 연결해서 보면 이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막장 드라마라면 또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건 정말로 중요한 신앙의 척도이고 법이다. 이것을 안다는 것은 정말로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버스 차비를 대신 내어 주듯, 혹은 지은 죄에 대하여 벌을 대신 받아 주는 그런 분이 예수님이신가?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속하신 전부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다음에는 그런 죄가 없어야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었는데도 아직도 사람들은 죄 가운데 있고, 모든 교회나 또 다른 종교에서 자신의 죄를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신앙이 잘못되었거나 예수님의 죽음이 별 효력이 없다는 말일 뿐이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신다. 이 지구상에 포도는 하나뿐이다. 포도라는 과일이 두 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위키 백과나 백과사전에 포도를 검색하면 포도, 포도, 포도 이렇게 여러 개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포도는 단 하나고 그 안에 거봉포도, 청포도 뭐시기 뭐시기 포도 이렇게 나오는 것이다. 모든 포도가 다 포도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은 the Grape라는 말씀이다. 그냥 포도라는 생명체 그것 자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지>라고 하신 것은 그 포도의 생명을 가진 포도나무 개체라는 것이다. (포도는 가지 자체가 나무라고 할 수 있기도 하다.) 청포도든 거봉포도든 다 포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라고 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리스도 곧 the Christ이고, 가지인 우리는 a christ라는 의미다. 포도가 세상에 하나이듯, 그리스도도 하나이지만, 포도가 세상에 많듯 그리스도(a christ)도 많은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성경을 모르는 것이다. 단언코.


그렇다면, 지금 배신하는 제자와 그 배신을 뒤로 하고 배신하는 자들을 위하여 십자가지시는 예수님이 포도나무와 포도나무의 가지와 같은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배신 때리고 도망가는 제자나 그런 제자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이 같은 정체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의 내용이다. 그 기도의 내용은 요한복음에 나오는데,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가 다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신 것이다. 아버지는 농부요, 그리스도는 포도나무며, 우리는 그 가지인 것도 바로 이것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상식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이 배신하는 사람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렇구나!’하기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분명히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는 곧 자신을 배신할 제자들과 예수님이 하나라는 것을 감사하시고, 또 곧 자기를 버리고 떠날 제자들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셨다고 감사하시는 내용이다.(요 17장) 이것은 아주 중요한 포인트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왜 중요한 포인트인가 하면, 배신하는 것과 같은 행동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사람은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을 보통은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사람 배신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냥 이웃이나 원수도 아니고 자신의 주님을 배신하는 사람과 예수님이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사람이 사람을 배신한다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라고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것은 사람이라서 그런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배신의 일 뿐 아니다. 운전하다 욕한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은 운전을 하지 않은 사람 외에는 없다고 할 수 있고, 살면서 ‘저런 인간 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뉴스만 봐도 그런 마음이 드니까…


그런 모든 것은 다 사람이라서 그렇다. 사람이라서 배신도 하고, 욕도 하고, 남을 미워하기도 하고, 이성을 보고 성적인 생각도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인간, 그런 사람과 예수님이 하나라는 것을 기도하시는 것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과 달리 그런 인간의 모습을 감추려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고 그런 인간의 모습을 부끄러워한 아담과 같이, 또한 율법의 행위로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회 칠한 제사장과 바리새인, 그리고 서기관과 같이.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사람과 하나라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과 같은 육신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모습이 바로 배신하는 인간의 그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감추려했던 모든 것이 다 제거된 상태가 바로 십자가에 달린 모습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모습은 일단 죄인이다. 반면에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의인이 되려 한다. 또한 사람은 죄인이라는 것과 자신이 다 드러나는 것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감추려 한다. 머리에서 나오는 지혜로, 그리고 손과 발의 행동으로, 또 옷과 같이 신분과 경력 등으로 자신을 감추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것으로 사람이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보이셨다. 그래서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고, 손과 발에는 못이 박히셨고, 발가벗겨졌다. 그 모든 수치와 고통의 총체적인 목적은 인간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신 것은 사람이 머리의 생각과 손과 발의 행동과 또 옷과 같은 고상함과 신분과 명예와 같은 것으로 자신을 가릴 때 온전한 사람이고, 그래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대인의 법에 의한 것이다. 그 법으로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죄인이 되는 것이 사람의 원래 정체성이란 것을 보여주신 것이 십자가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누구나 세상의 법으로는 죄인이 된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제자들은 이미 자신들의 행위가 자신들을 심판했다. 자신들은 배신하면 안 된다는 의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배신하는 자신들의 모습이 부끄러워 도망갔고, 베드로는 먼발치에서 그런 자신의 모습에 죄책감을 어떻게 해 보려 예수님을 몰래 보려 했다. 그러니까 그들이 가진 스스로의 의가 그들 스스로를 심판하고 도망가는 죄인을 만들었다. 마치 유대인의 가치기준과 법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었던 것과 같이.


사람은 누구나 세상의 기준, 그리고 자기 안에 있는 의의 기준에 의하여 늘 심판 받는다. 그 모습이 바로 세상의 기준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십자가 밑의 백부장은 로마의 법이 못 박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볼 때 예수님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제자들도 자기가 가진 의로 자신들을 죄인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도망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과 만나는 모습은 갈등의 연속이었다. 제자들은 계속 도망가고 예수님은 계속 그들을 따라다녔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스스로를 심판하여 예수님 앞에서 면목이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원래 그런 것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그것을 알게 하는 것 때문이었다는 것을 계속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배신하고 스스로 심판하는 모습이나 세상의 기준으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같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예수님이 하나라고 기도하신 것은 모든 인생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했던, 이 땅에 오신 목적과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그 목적과 배신하고 도망가는 제자들의 모습이 하나라는 것이다. 다만 제자들이 그런 자신의 모습을 인간의 본질로 보는지, 아니면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같이 부끄럽게 여기는지의 문제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모습으로 달리시니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제자들은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겨서 도망을 간 것이다.


신앙은 결국 사람의 본질을 인정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람은 자기가 원치 않고 부끄러운 모습이 너무 많다. 그렇게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한다는 것, 그것은 그 원치 않는 것이 자기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원래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느냐? 아니면 그것을 죄로 여기느냐? 하는 것이 신앙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알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얼마나 감동이고, 왜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는지, 왜 하나인지, 분명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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