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약점은 <불확실성>이다. 사람은 내일 자신이 살아 있을 것은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또 반대로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모든 종교가 멸망하지 않는 절대적인 동력이다. 물론 사람이 가진 불확실성은 종교에만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보험과 같이 살아가는 문제에 있어서도 불확실성은 오늘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하게 하는 동력이다.


신앙, 특히 기독교 신앙에서 종말론적 신앙관은 사람이 가진 불확실성이 극대화된 문제일지 모른다. 그러다보니 의외로 그럴 것 같지 않은 지식인들조차 쉽게 빨려 드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더 안다는 것은 불확실성이 더 증폭된 것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1992년 우리나라를 휩쓴 다미선교회의 일도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종말론적 신앙은 이 시대 혹은 21세기나 세기말적 신앙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던 그 때도 사람들이 그것을 염려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망할 것이라고 하니 우선 제자들부터 ‘이제 세상이 망하는구나!’ 생각하고 예수님께 그 때가 언제인지 물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세상이 망하는데 그 때를 안다고 그것을 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는가?


모든 사람들은 잠재적으로 세상이 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저변에 깔린 것이 종말론이다. 다만 그것이 언제일지, 특히 자기가 살 동안 그런 일이 있을 것인가? 하는 것에 신경을 좀 쓰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은 이 세상이 언젠가는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 틀림없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세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러니까 망할 것 같은 세상, 그 세상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고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일구었던 것이나, 꿈을 가지고 준비하던 것이 망하면 세상이 무너졌다고 한다. 그것에서 우리는 각 사람은 자기가 정한 세상, 자기가 생각한 어떤 것이 되지 않으면 세상이 망한 것과 같다는 그런 자기들의 세상이 있다는 것이다. 먼저 그런 세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다 아는 이 물리적인 세상, 현상계인 세상이 있다. 태양계의 세 번째 행성인 이 지구와 그 안에 모인 사람들이 사는 이 지구별, 그 세상이 있다. 종말론적 신앙에서 언젠가는 망할 것이라는 그 세상이 바로 이 세상이다.


그리고 또 하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세상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세계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고 하나님의 법이 세상을 움직이는 기본법이 되는 세상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천국, 하나님의 나라, 천년왕국과 같은 것으로 표현한다. 그 모든 표현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의가 법이고 모든 것인 나라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세상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멸망할 세상, 끝이 올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 단초가 될 것이다. 이것을 구분 못하면 사람들의 불확실성이 이상한 신앙으로 삶을 끌고 가기도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 제자들이 와서 ‘세상의 끝에는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물은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이 망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연고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이 망할 것이라고 하니, 예루살렘이 망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망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또 세상이라는 것이 이 물리적인 현상계로 인식(두 가지는 같은 뿌리임)하고 있었던 제자들로서는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끝이 되면 전쟁과 기근이 일어난다는 것과 같은 여러 징조를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세상의 끝이 임할 것이라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들에서 주의 깊게 볼 것은 그런 징조가 끝이 아니라, 세상의 끝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에는 아이러니한 것이 있는데 기독교인들은 빨리 온 지구에 기독교를 전하면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생각하고 힘내자고 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지구 종말을 앞당기자는 소리가 될 수 있고, 또 역설적으로 그렇다고 종말을 막기 위해서 복음 전하는 것을 천천히 하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 되는 것이다.


정말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의 끝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다면 바로 여기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앞에서 세 가지 세상을 이야기 했었는데 예수님께서 끝이 오리라고 한 세상의 기본은 자기가 세상으로 여기는 세상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세상이 무너진 것과 같다고 여기는 자신의 세계, 자기의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끝이 나야 하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어떤 것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망한 것과 같이 여겨진다는 것은 그 일이 자기 뜻대로 되었을 때 제대로 되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의 뜻대로 되었을 때 의롭고 선하고 바르게 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기의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화가 나고 더 크게는 세상이 망한 것과 같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일에 대하여 자신의 의지가 반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나라에서 의지가 반영되는 권세를 가진 사람은 왕이다. 그러니까 자신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일에 대하여 자신이 왕인 세상이라는 것이다.


큰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 그 시험에 사활을 거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그리고 그는 그 시험만이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해 보자. 이것은 가정 같지만 실제로 이런 사람은 너무나 많다. 그리고 그것은 꼭 시험이 아니라도 그런 일은 공기만큼 많이 있다. 그 사람에게 있어 자신이 시험이 되는 것은 절대 선이다. 자기 기준에 자신이 시험에 합격하면 세상은 자기 것 같고, 세상이 바르게 된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시험에 낙방했다면 세상을 잃은 마음이 들고 세상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이 시험 결과에 대하여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이미 가졌다는 것이다.


가끔씩 뉴스에서 자기 맘대로 되지 않았다고 불을 지르는 것과 같은 일들을 듣는다. 때로는 그 일이 정말로 동정이나 공감이 가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반문한다면 누가 그에게 그가 생각하는 일이 그의 뜻대로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이 자신과 연관된 세상, 바로 그의 세계의 왕이 된 것이다. 그것도 스스로.


예수님께서는 어떤 이들은 바로 그런 세상이 끝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복음이 자신의 세계 전반에 퍼져서 자신의 모든 세계와 삶이 하나님의 복음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은 자기가 왕이 되고 자신의 뜻대로 되어야 선한 것이 되는 그런 세계는 끝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세계가 끝이 났을 때 비로소 예수님이 자기 마음에 오시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예수님의 재림인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신 것과 무관하지 않다. 아니 그것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사람은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세우겠다고 하신 예수님이 그 마음 안에 본성으로 거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다시 세우겠다고 하신 성전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내용은 없이 형식만 지키고 무엇이 본질인지 알지 못하며 지은 자신의 세상과 자신의 성전이 무너지면 그 위에 예수님께서 진정한 성전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아니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왜 사는지도 모르면서 삶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사랑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사랑하고 치장하는 것보다 몇 배나 더하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거하시지 않는 성전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한 유대인들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왜 사는지도 모르면서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고 가꾸고 준비하고 열심인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삶이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없이 무너지듯이 끝나버리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의 끝이고 그 끝이 있어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끝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진 가장 큰 불확실성은 사실 미래가 아니다. 실은 왜 사느냐 하는 그 불확실성이다. 매일 눈 뜨고 일어나사 숨을 쉬고 또 하나님 계시지 않는 성전을 날마다 지극 정성을 섬긴 유대인들처럼 왜 사는지도 모르는 자신의 삶을 죽어라 살고, 더 안타까운 것은 왜 사는지도 모르는 그 삶을 살면서 ‘네가 선하니, 내가 선하니’하면서 서로를 정죄하는 자신이 하나님이 된 기준은 또 어찌나 그렇게 철저하게 지키고 사는지 놀랍지만 안타까운 것이다. 바로 그 주장이 세상의 모든 시끄러움과 갈등과 죄의 원인이라는 것을 모른체.


게다가 그 불확실성을 “카더라” 이론에 의지하여 자신의 삶을 맡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이든 불경이든 그 경전이 자기 안에서 확신이 되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생수의 강이 자기 안에서 넘치듯이 말씀에 확신을 가진 것이 아니면서 교회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하니, 또 ‘절에서 그러라.’고 하니 그런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자신이 가진 불확실성이 다 해결되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건 실로 엄청난 도박이다. 죽기 위해서 고층에서 떨어지다가 후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는 성경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불경과 같다는 것도 아니다. 성경이 정말로 자신의 이야기로 들리는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 정말로 확실하게 자신의 것이 되었는지, 성경을 읽으면 자기 자서전과 같고 일기 같은지, 나의 모든 모습이 성경에 있는지 전혀 확신하지 못하면서 그저 성경을 학문으로 공부한 사람들의 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그 모습이 자기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사람이 되라고 성전을 주신 하나님은 자기 안에 없는데 성전에서 예물을 드리면 모든 것이 해결 된 것으로 여긴 유대인들과 같은 것이다. 또 자신이 성전이 되는 것, 그러니까 자기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너무 귀해서 그것이 금과 같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성전 기물을 금으로 만들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모르니 성전으로 맹세하면 구속력이 없고, 성전 금으로 맹세하면 구속력이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성전, 하나님이 거하시지 않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성전과 예루살렘 성이 상진인 나라요 세계가 무너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 사는지도 모르면서 삶에서 만져지는 것들이 인생의 본질이라 여기면서 그것에 목숨을 걸며 살아가는 그 세계, 자기의 뜻대로 되었을 때 선한 세상이라고 여기는 그 가치관이 주인인 세계, 바로 그것이 무너지고 끝을 맞이할 때 비로소 예수님의 재림, 곧 자기 마음에 예수님이 임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 모든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시작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것이다. 십자가를 보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생각이 나고, 자기가 주인인 세상, 자기 가치관이 선이라고 여기는 자기만의 안목과 가치관이 무너지고 성령께서 사람 마음 안에서 예수님의 모든 것이 생각나게 하시고, 그 예수님의 본성이 자신의 모든 삶, 자신의 모든 세계, 곧 온 땅에 복음이 전해질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길목에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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