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4:15-28 큰 환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8. 10. 12:49 Writer : 김홍덕

사람에게 환난이란 어떤 것일까? 생각하면 우선 큰 병이 든다거나, 사업이 망하는 것과 같은 것을 생각한다. 한 마디로 욥이 망하는 과정과 같은 것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성경, 그리고 마태복음 24장 이후에 나오는 환난과 재앙은 그런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 환난의 시작은 ,멸망의 가능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는 때> 그때부터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멸망의 가증한 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온 세상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신앙 안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의도와 다르게 존재하거나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이 망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같이 행동한다. 시간을 알기 위하여 산 시계가 아무리 예뻐도 시간을 알려주지 않으면 이미 망한 것이고, 폐기되는 것은 그저 시간문제일 뿐인 것과 같은 이야기다.


그런 멸망해야 할 것은 망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버젓이 거룩함, 곧 하나님께서 구분하신 것과 있는 것이 자기 눈에 보이는 사람은 환난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 환난은 앞에서 쓴 글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객관적인 사건이 아니라 아주 주관적인 사건이다. 어떤 순간, 어떤 사람도 예외 없이 ‘아 저것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이구나!’ 이렇게 알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물론 실제로 그런 날이 말씀대로 오겠으나 그것은 약속의 증거이지 본질은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서 땅에 심긴 씨앗이 싹이 나고 나무가 되고 열매가 열리듯 자기 안에서 자라나게 되면 어느 순간 세상에 있는 것, 또 종교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어떤 것을 볼 때, ‘아 저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말하는 것이구나!’ 이렇게 깨닫게 되고,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그냥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환난의 시작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게 되는 생명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기쁨인데 그것이 왜 환난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렇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는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때까지 알고 믿고 본질로 알았던 것이 다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 빨간 약을 먹은 것과 같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환난은 돈이 없어지거나 건강이 상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일도 사람이라는 존재에게는 큰 타격이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인 것은 틀림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최고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겪는 환난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욥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욥이 모든 것이 다 망했고, 친구들이 찾아와서 ‘네가 분명히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어 그렇다.’는 끊임없는 주장에도 굴하지 않았지만, 결국 그는 자신이 하나님과의 마지막 대화를 통하여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말했다는 회개를 하게 된다. 즉 그에게 가장 큰 환난은 하나님을 잘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알고 믿고 사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에게 있어 공통되고 기본이며 가장 큰 환난은 자기 정체성의 상실이다. 이것은 우리가 영화나 책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의 한 예를 든다면 헐리웃에서 나오는 영웅시리즈 영화는 어느 시리즈에서는 반드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갈등을 다루는데 그러한 것에서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이라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증명된다. 그것은 곧 자기 정체성이 상실되는 것 이상의 환난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또 그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 보이면 그 혼란은 이루 말하기 어렵다. 그날 까지 본질로 알았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은 정말로 혼돈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정말로 인간의 정체성 자체에 대한 환난이다.(그게 무슨 환난이라고 호들갑이냐 하는 사람은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이다.) 비유가 어떨지 모르지만 아이폰을 사용하기 전에 전화기는 그저 삼성이 제일인 줄 알았다. 당시 옵니아폰을 사용하던 나는 아이폰을 처음 접하고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난 10여 년간 속고 살았구나!’ 


그냥 전화기 하나도 그런데, 자신의 인생의 목적이 돈에 있는 것으로 여기면 돈을 위해서라면 사람과의 관계도 희생하며 살던 사람이 인생의 본질은 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은 정말로 혼돈스러운 것이다. 명예도 그렇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이 주신 본질은 깨닫지 못한 체 그런 상실을 겪은 사람들이 자살하기도 한다. 그게 인생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이다. 사람이 빈 그릇이기에 무엇을 채우는데 여태 채워왔던 것이 담아야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것은 부모인 줄 알고 살았던 사람이 실은 자기 부모를 죽인 원수임을 알게 되는 이야기 같은 환난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날이 안식일이나 겨울과 같이 육신에게 제약이 따르는 시절이 아니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이 먹고 살기에 아주 중요한 일이나, 사업상 중요한 계약이나, 아니면 아주 몸이 약하고 아플 때가 아닌 날, 하나님에 대한 계시가 열리기를 바라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야 어떻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면 겉옷을 가지러 돌아가지 말고 빨리 산으로 도망가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보이기 시작하면 도망가듯 말씀을 좇아야 한다. 출애굽 때에도 천사들이 애굽의 처음 난 것을 다 죽이면 바로 떠날 수 있게 허리띠를 동이고 신을 신고, 서서 양을 먹으라고 하셨다. 롯에게도 뒤 돌아보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계시가 열려서 천지가 창조되듯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안목이 생기면 그 안목을 좇아서 떠나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겪는 가장 큰 일은 자기 정체성이 상실되고, 평생을 수고한 것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자식을 위하여 평생 살았는데 자식이 배반하는 것과 같은 것은 자식이 배반한 것이 큰  일이기도 하지만 자식을 위한 자신의 삶이 허망해 지는 것이 진정한 상처고 환난인 것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에 대하여, 또 인생의 본질에 대하여 자신이 알았던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가 이때까지 본질이라 여겼고, 하나님이라 여겼던 것이 멸망의 가증한 것인데, 자기가 거룩한 하나님과 같이 섬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삶의 가장 큰 환난이다.


이러한 환난은 다시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삶에 한 번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자기 삶에 대한 안목이 열려서 그날까지 본질로 또 하나님이라 알았던 것이 허상이요 형식이며, 자기가 가진 선악에 의하여 만들어진 하나님이요 우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사람은 겉옷, 곧 세상에서 자기 신분과 육신의 먹거리와 같은 일들을 챙기지 말고 하나님을 만나는 곳(산)으로 떠나야 한다는 말씀이 이 말씀이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예루살렘에 오셔서 이제 십자가를 지시기 얼마 전인 시점이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면 제자들의 심령이 무엇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며, 무엇이 거룩한 것인지 알게 되는 시점이 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날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모습을 설명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무엇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며, 어떤 것이 인생의 본질이며, 누가 참 하나님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육신의 모든 것은 버려두고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이 지시할 땅(사람의 정체성)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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