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면 산으로 도망가라는 예수님의 말씀. 과연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 말씀을 대할 때 생각해 보는 것은 '산에 가면 끝인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의문스러운 것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보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성경 마태복음에서는 이 24장 15절 말씀 뒤에 괄호를 해서 그 안에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라고 설명이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주 말씀하신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것과 비슷한 말씀이다. 그러니까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만 볼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이들은 무엇을 보면 그것이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또 성경이 말씀하시는 세상의 끝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떤 날이 되면 정말로 이 물리적인 세상이 망하고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다시 오실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날에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다시 오시는 일의 표현이고 증거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의 증거라는 것이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핵전쟁이든 어떤 이유에서든 이 땅의 모든 것이 망하는 날이 오겠지만 그것이 유일한 예수님의 재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은 승천하신 주님이 다신 사람에게 오시는 것인데,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승천하는 것을 보는 이들을 향하여 이 중에서도 예수님이 다시 오는 것을 볼 사람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성령께서 오셔서 사람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이 생명과 같이 자리하게 하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재림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 승천하신 그 주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 그리스도라는 그 정체성이 다시 사람들의 마음에 임할 것이고, 그렇게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의 생명이 심령의 본질이 된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람들을 보면 예수님을 보는 것과 같게 될 것이기에 그것이 예수님 재림의 본질이요 약속인 것이다. 그리고 그 약속이 어느 날 구름타고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실체로 확정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 사도와 같은 사도들 역시 재림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언급하시기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교회라는 곳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명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인간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가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이 된 이들이 모은 곳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즉 마음에 예수님이 오신 이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예수님 재림의 본질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승천하신 주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 자기 심령에서 자기 인생의 본질로 받아들일 때 그 사람에게 오시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 예수님의 재림은 절대로 객관적이지 않고, 또 아무에게나 일어나고, 속된 말로 개나 소나 다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보니 그 보여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자신의 인생 본질이고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이 예수님의 임재하심이 있는 이들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귀 있는 자>, 또 <읽고 깨달은 자>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구분 곧 거룩하게 되는 것은 그렇게 예수님의 정체성이 육신을 가진 자신의 삶의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예수님의 재림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믿는다. 그들은 믿으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된다. 그 심령 안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이심으로 그것이 바로 그 소식을 듣는 이들, 그들의 본질이라는 것을 전하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하고자 하는 것을 받아들인 사람이 곧 예수님의 임재가 있는 사람이고, 그것은 당연히 승천하신 주님이 그 사람 마음에 다시 오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이미 그 마음에 약속이 있기 때문에 증거가 나타날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밖에 없다. 즉 자기 마음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전하고자 하는 것이 이미 있으므로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증거와 실체로 분명히 오신다는 것을 남자 아이가 여자를 신부로 맞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이 본능적으로 분명히 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읽는 자 곧 자기의 것으로 읽은 자는 깨달을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아울러 많은 말씀을 귀 있는 자는 들을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말을 하시는데 그것을 듣지 못하는 것은 벙어리가 아니면 누구나 다 가능한 일인데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사람의 해부학적 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알 수 있는 심령을 가진 자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소경이 육신의 눈이 어두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와 본질과 의를 보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은 세상의 육신으로 가진 모든 사람들이 봤을 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를 알아듣는 사람, 무엇이 본질인지, 어떤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볼 수 있는 사람이어야 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어야 예수님과 같은 본성과 생명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생명과 같은 본성을 가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것이 그 사람에게도 가증스럽게 보이고,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여기시는 것이 그에게도 거룩하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증한 것이고 무엇이 거룩한 것인지는 분명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보내셔서 전하고자 하신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과 본성과 생명이 심령에 있는 사람은 무엇이 가증한 것인지, 무엇이 거룩한 것인지 전혀 궁금하거나 의심스럽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것이 의문이라면 당연히 아직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것이다.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거룩하지 않은 것이 거룩한 척 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하지 않은 것이 거룩한 척 하는 그 자체가 가증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보실 때 가증한 것은 거룩하지 않은 것이 거룩한 척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하시지 않는 성전이 그렇고, 하나님의 의와 뜻은 모르면서 율법을 행실로 지키는 것이 그렇고, 심령에 하나님의 생명이 본성이 된 사람들이 없는데 화려하게 지은 오늘날의 교회가 그렇다. 그것이 바로 가능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책망하신 것과 같은 마음이 자기 안에 있기에 성경에 기록된 그들을 볼 때 예수님께 책망 받을 만 하다고 동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것을 보면 그것이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지 분명하게 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모든 객관적 현실이 아니라 어떤 이에게만 보이는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정리한다면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나타날 것인데 그것을 보면 산으로 가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들은 그것이 보일 것이고, 그것이 보이는 사람은 어떤 세계가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이 말씀이 그런 것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 곧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거짓말 하는 사람을 싫어하신다고 하시고, 또 외식하는 자를 싫어하시며,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 모든 것은 내용과 형식이 같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양의 탈을 쓰고 있어서 양으로 보이는 늑대는 싫어하시지만 늑대가 늑대로 표현된 것은 선하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죄를 시인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죄인이 죄인이라 해야지, 죄인인데 행실만 거룩하게 하면서 의인인 척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다. 어느 순간 그것이 구분되어 보인다면 그 때가 바로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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