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홍수 (9) - 세상과 교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7. 6. 23:22 Writer : 김홍덕

노아의 방주는 성경에 대하여 묵상하고 공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의 예표라고 이야기 한다. 방주가 교회의 예표가 된다면 홍수는 당연히 세상이 될 것이다. 흔히들 이야기 하는 죄악이 넘치는 세상에서 생명을 지킬 수 있는 곳이 교회라는 것이다.


방주가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방주는 당연히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방주가 그리스도 또한 교회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이다. 이 방주는 지금 하늘의 창과 깊은 샘들이 터져서 발생한 홍수 상황에서 유일한 피난처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에 있어, 세상의 방법을 도입하고 세상의 법칙이 동원되어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아 정체성에 대한 해갈에 필요한 물이 넘쳐나서 오히려 마실 수 없는 홍수가 된 상황에서 피난처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사람들의 갈증, '왜 사는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자아 정체성의 갈증에 있어 유일한 해답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고, 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상황에 있어 피난처가 되시는데, 그것은 하늘의 창과 깊은 샘이 터져서 물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피난처라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문화와 지식과 철학과 과학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과학은 사람의 근원을 과학적으로 찾고자 생물학을, 또는 우주과학을 연구하고, 철학과 인문학은 사람 내면의 생각들을 연구하고 있고, 세상적인 문화는 갈증을 잊게 하는 즐거움을 끊임 없이 쏟아내고 있다. 한마디로 물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 하나 그런 것 안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자아의 정체성을 알고 만족하는 사람이 없다. 큰 스님도, 재벌 총수도 대국의 대통령도 어느 누구 하나 다른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볼 때 공감할 수 있는 해답을 찾았다는 사람이 아직은 없다.


그렇다면 교회들은 또 어떤가? 교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함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인간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에서 멀어지자 세상의 각종 법과 좋은 것을 교회 안으로 끌어 들이고 있다. 예를 들어 교회를 화려하게 짓는 것과, 다양한 시설을 교회 안으로 가져와서 신앙에 활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어느 것 하나 세상을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작정하고 발전하는 세상의 일부를 교회 안에 가져와서 승부가 될리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 학교의 실질적 문제이다. 교회가 성경말씀을 동영상과 같은 세상에서 좋은 것으로 아무리 만들어도, 세상이 만든 만화를 이길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아내로 취한 것과 같은 것이다. 성경 말씀을 동영상으로 만들면 문제가 해결될 줄 알고, 교회를 편하고 좋은 시설로 만들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소간의 문제해결에 영향을 주는 것 같지만 수박 겉핡기에 불과한 상황이다.


진정한 문제의 해결은 성경 말씀을 화려한 CG로 동영상을 만들고, 교회의 시설을 최첨단으로 하거나 휴양할 수 있는 곳을 만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아는 것, 그것 뿐이다. 방주는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것, 그것이 바로 노아의 방주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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