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홍수에 있어 <방주>는 절대적인 요소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의 규격을 알려 주셨고, 이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창 6장) 문제는 그 규격의 단위가 <규빗>이라는 것이다. 이 규빗은 대체적으로 사람의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 까지의 길이를 말한다.


규빗은 '1m는 진공 상태에서 빛이 1/299,792,458초 동안 지나간 거리' 처럼 객관적으로 표준화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신체 사이즈에 따라 다른 아주 주관적인 단위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노아의 방주는 물론이고 성전을 지을 때도 주관적 단위인 이 규빗을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객관적이지 않은 단위를 기준으로 방주를 만들라고 하신 것은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규빗이 정확하게 몇 cm인지 연구라하고 하시기 위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관적인 단위로 방주와 또 성전을 지으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다양한 모습과 삶을 산다. 이것은 자신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단 하나의 모습으로 표현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방주라는 배의 객관적 규격이 얼마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방주를 지으라고 하신 것은, 홍수와 같은 세상 가운데 있지만 홍수를 피하고 견뎌낸 방주와 같은 장소를 만들고 그 안에 피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으로 보면 교회를 말씀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홍수와 같이 창궐하는 물에 빠지지 않고 살 수 있는 곳을 만들고 그 안에 거하라는 것이다.


물은 천지창조 과정에서도 나오는데 별도로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표현보다,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또 바다와 육지로 나누는 과정을 말씀하셨다. 특히 하나님께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신 것은 사람이 먹어야 할 물과 먹어서는 안되는 물이 있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 (창세기) 천지창조 둘째 날 -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


홍수의 시작에 대하여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합하여 진 것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창 7:11) 즉 이는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에게 상수도와 같은 물과 하수도와 같은 물이 합쳐져서 홍수가 났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창세기 6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아 네피림을 낳았다'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 홍수라고 했다. 


즉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아 정체성에 대한 끝없는 갈증을 가지고 마실 물을 찾는데, 하나님의 아들과 같고 궁창 위의 물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사람의 딸들과 같고 궁창 아래의 물과 같은 세상의 다양한 지식이 물과 같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합쳐지면 홍수가 되고, 그것이 합쳐지면 위대하고 장대한 지식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지식이 합쳐진 다양한 것이 있다. 대표적인 것인 "창조 과학회"와 같은 것이고, 또한 교회의 예식과 설교 속에 스며들어 있는 세상의 법칙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는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이요 궁창 아래의 물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는 것이 합쳐져서 위대한 것을 낳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세상, 즉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철학과 과학과 지식이 짬뽕이 되어 넘쳐나는 세상, 이 세상이 바로 홍수인 것이다. 이런 홍수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세례와 고백의 과정을 거쳐낸 사람들이 살아 남기 위하여 만드는 것이 방주, 곧 교회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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