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의, 그리고 공의 (1)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4. 8. 17:44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의 의, 개인의 구원을 이루다.

 

신앙 안에서 흔히 하는 표현 중에 ‘세상’이라는 것이 있다. 이 말은 자칫 사회와 물리적인 세계를 부인하는 것과 같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이것은 어떤 가치관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떤 것을 의롭다 여기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박수를 받는 범주를 하나의 세계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는 세계가 있고, 아닌 것이 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그 가치관의 세계를 <세상>이라고 한다. 즉 같은 물건, 같은 현상이라도 어떤 가치관으로 보느냐에 따라 세상이 되기도 하고 신앙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 역시 사회적으로 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속해 있고, 물리적으로 볼 때 인지되는 형이하학의 만물 속에 있다. 그 안에서 이 모든 것을 어떤 가치관으로 옳게 보는가? 하는 문제가 신앙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고 이러한 것을 그렇게 인지한 세월이 그리 긴 것 같지는 않다. 달력의 세월로는 말이다. 하지만 카이로스의 시간 안에서는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왔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신앙의 세계 안에는 여정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 것 역시 얼마 되지 않는 것 같다.

 

신앙이라는 것은 여러 함축적인 표현으로 축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요즈음에 묵상해 보는 것은 <의와 공평>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있고, 그 하나님의 의 안에서 공의, 즉 공평 혹은 평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전개는 범위로 본다면, 개인의 신앙에서 공동체의 신앙으로 확장되는 것에 관함이고, 신앙의 여정으로 본다면 장성한 신앙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안다는 것이 말이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의다. 이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로 칭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와 같이 육신을 가진 <나>라는 개인도 그 분과 같은 성품으로 살고, 그 분의 신분을 따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신념이 아니라 부인할 수 없는 수용이라는 것도 중요하다. “믿습니다!!” 소리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부인할 수 없는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 비로서 믿음이란 것이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 그 분이 육신을 가지고, 육신이 가진 연약함을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이 된다는 것은 내 안에 <의>가 바뀌지 않고서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아들, 즉 사람들의 표상이요 영웅은 사람의 연약함을 극복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즉 육신이 가진 갖은 욕망을 극복하는 것과, 평범한 사람이 이루지 못한 업적을 이룰수록 영웅이 되고 박수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고 하나님의 아들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 변질되는 모든 변질의 근본 원인이다. <의>가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신앙 여정 역시 이러한 변질, 곧 죄에서 벗어나기 위한 세월을 하염없이 보냈다 할 만큼 보냈다. ‘예수를 믿으려면 성경을 잘 알아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의가 있어야지!’, ‘성공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등등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이 예수를 잘 믿는 조건으로 형성된 내 가치관을 벗어내는 것에 거의 사활을 걸고 살았던 신앙의 여정이었다. 그리고 내가 중요하게 여겼던 그 모든 것은, 어떤 이는 할 수 있고, 반면에 어떤 이는 선천적으로 할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모태신앙이 유익하다’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십자가를 자세히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인 십자가 그 어디에도 그런 것은 없었다. 오히려 발가벗겨지고, 손과 발에 못 박히고, 머리에 가시관을 쓴 패배자요 죄인의 모습을 보여주신 곳이 십자가였다. 그것은 내 거울이고 나를 조성하신 틀(Mold)이었다. 나의 모습도 그러했다.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가시관 쓰신 예수님과 같이 내 생각이 나를 구원할 수 없고, 아무리 행동으로 노력해도 손과 발에 못 박히신 주님과 같이 행동으로 나를 구원할 수 없었다. 신분이야 더 말할 것도 없이 발가벗겨진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세상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도 더불어 알게 되었다. 내가 이 세상의 일부라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다. 하나님의 의가 뭔가? 모든 것 중에서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의만 나에게 의미가 있다. 나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즉 아버지의 성품으로 사는 아들, 즉 하나님의 성품으로 사는 아들로서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알고, 또 나의 이 초라한 인생도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로 살도록 하시기 위하여 만드셨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의에 대하여 아는 첫 걸음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는 나로 하여금 세상에서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에 있음을 알게 했고, 그 깨달음은 나로 하여금 모든 신앙적 변질을 알 수 있게 했다. 이건 본성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신앙의 여정은 공동체를 찾아 나서는 순례자의 여정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공평하심, 하나님의 공의라는 문에 손잡이를 붙잡을 수 있는 자리에 섰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기에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나의 본분이라는 열쇠를 가지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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