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암의 권세라는 것, 흑암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그것의 권세라는 것은 보이지 않고 알지 못하기에 따르는 대세 같은 것이 바로 흑암의 권세인 것이다. 마치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와 같이 보이는 사람들로서는 알 수 없는 암묵적 동의와 공포에 순종하는 그 모습이 바로 흑암의 권세인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흑암은 눈이 보이지 않거나 조명이 어두워진 상태를 말하는 한정적인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흑암과 어두움은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컴퓨터를 알지 못하면 눈을 뜨고 있고 사회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어도 컴맹이라고 하듯, 하나님에 대하여도 알지 못하면 그가 육신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아무런 지장이 없어도 그는 어두운 사람인 것이다.


그런 어두움에는 권세가 있다. 그것은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수결의 원칙처럼 그냥 대세를 따르는 그것이 가장 큰 권세이다. 맹인 만 명이 있어도 눈 뜬 사람 한 명의 안목보다 못한 것이다. 그것처럼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그렇게 많고 하나님을 안다고 떠드는 바리새인과 율법사들과 제사장들이 그렇게 많아도 예수님 한 분 보다 못했던 것이다. 그 유대인들은 다 어두운자요 맹인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신 것이다. 그렇게 육신을 고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영적인 어두움을 고치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때, 예수님이 계시던 그 시절의 유대인들과 백성들처럼, 오늘의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살고 있다. 교회 안에서도 뭔가 더 역량이 되는 사람이 인정을 받는다. 아무리 아니라고 우기고 때로 실례가 있다 해도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의 흐름은 교수가 장로 되는 것이 전과자지만 진정한 신앙고백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당연히 쉬운 것일 뿐 아니라, 신앙고백을 장로임직 때 내는 돈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흐름에 대하여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 그것이 바로 흑암의 권세인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냥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바로 권세인 것이다. 그 권세를 지금의 큰 교회들의 목사들이 가지고 있다. 장로들과 유연하게 말이다.


사실 골로새서가 쓰인 이유가 바로 이러한 것과 관련이 있다. 그 당시에도 골로새교회의 지도자인 에바브라보다 세상적인인 지식이 가미된 사람들이 교회에서 더 인정받아야 한다는 이야기에 대하여 쓴 바울 사도의 편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풍조는 당시 모든 사도들의 심각한 고민거리였다. 특히 사도요한은 요한 1서를 통하여 이러한 사람들을 적그리스도라도 규정하기도 했다. 바울 역시 이것이 단순히 골로새교회의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여겼기에 이렇게 본적도 없는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교회들도 동일한 흐름 안에 쌓여있을 뿐 아니라, 큰 교회는 앞장서고 있기도 하다.


바울 사도는 그러한 흑암의 권세의 반대편, 즉 흑암의 권세가 아니라 밝은 세계에 대하여 이르기를 <사랑의 아들의 나라>라고 했다. 흑암의 권세의 반대가 밝음의 권세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사랑의 아들의 나라’라고 한 것이다. 즉 ‘흑암↔아들의 나라’, ‘권세 ↔사랑’이라는 대립 구조를 설정한 것이다. 흑암의 반대가 아들의 나라라고 한 것은 어두움의 대상이 바로 생명에 대하여 어둡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기에 생명의 관계로 만나지는 아들이라는 그 관계성이 바로 생명의 대표이며, 생명이신 하나님을 모르는 흑암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 삼으시기 원하는 생명의 아버지이심을 아는 것이 바로 컴맹을 탈출하듯 흑암을 벗어난 세계인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나라에는 권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권세와는 달리 능력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힘을 바탕으로 발생하는 것이 권세라면, 사랑은 연약함을 기반으로 생기는 것이다. 즉, 권세는 강해질수록 생기는 것이라면 사랑은 약하면 약할수록 자아내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내가 더 잘할 수 있습니다.' 라고 여기면 여길수록 흑암의 권세가 강해지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저는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진리를 받아들일수록 사랑이 생기는 것이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관계는 아무런 수고도 공로도 소유도 요구하지 않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안에서 온전해 지는 것이기에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행위나 공로나 소유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공로주의적 신앙에서, 하나님 앞에서 아들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그저 낳아지는 생명의 관계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연약한 인생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는 것, 그리고 그 안에는 아들이 존재 자체로 아버지를 기쁘게 하듯, 권세를 일으키는 능력이나 소유나 공로가 없어도 되는 세계로 우리를 옮기셨다는 말씀이신 것이다.





그리고 14절에서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하신 것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우리를 지으시고 세상에 보내신 목적의 빚을 갚는 것은 어떤 소유나 공로를 하나님께 드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아들이 되는 세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이요, 우리의 죄를 사함 받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 사는 것이 흑암의 권세인 공로와 소유로서가 아니라 비록 연약하나 그것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존재와 생명의 관계인 아들로서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아들의 나라요 우리의 죄 사함이요 구속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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