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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마지막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후서 Date : 2019. 1. 25. 08:38 Writer : 김홍덕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이제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을 그리스도에게 배운 대로 사는 삶을 마감하기에 앞서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권면하고 있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외면하는 전제가 있다. 이 베드로후서는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을 향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직접적인 교훈이 되고, 이 말씀을 읽었을 때에 자신이 같은 믿음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사실을 고백하고 시인할 때에 같은 믿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단지 교회에 다닌다고, 또 복음에 대하여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것 그 하나를 근거로 자신이 베드로 사도와 같은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초대를 받으면 말석에 앉으라고 하셨다. 사람이 아무리 겸손한 모습으로 자신이 베드로 사도와 같은 믿음을 가지지 않았다고 해도 그 삶과 말에서 나타날 것은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들이 등불을 말 아래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자신을 같은 믿음을 가졌다고 여기는 것이 문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이 서신에서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는 <옛 신앙>이기 때문이다.


흔한 생각으로 이전에 절에 다니다가 이제 교회에 다니게 된다면 불교는 옛 신앙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지금의 새로운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물론이고 모든 사도와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 제 아무리 다니는 성전이 교회라도 이전에 절에서 빌든 것을 교회에 와서 똑같이 기도하고 빌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옛 신앙일 뿐 아니라 간음이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며, 육신의 정욕대로 사는 것이다. 절에서나 성당에서나 교회에서나 심지어 무당 가릴 것 없이 그 구하는 바가 육신의 어떠함에 대한 기대에 귀속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옛 신앙이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신들(사람들이 신이라고 하는 것일 뿐이지만)에게 사람들이 빌고 있는 육신이 바라는 바에 대하여 들으시는 분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그의 주권에 달린 것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 모든 인생들에게 그 삶을 주실 때 이미 다 주시고 예비하신 것이다. 사람은 그 안에서 살면 된다. 살아가면서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부실하다고 항의하는 것이고, 그것을 채워 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와서 밥 달라, 돈 달라, 배우자 달라, 사업 잘 되게 해 달라고 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의와 신앙을 좇아 누구나 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육신의 정욕이다. 그리고 그것을 좇고 그것이 있어야 한다고 의로 여기는 것이 간음이다. 이 모든 것이 옛 신앙이다.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신의 성품의 참예함은 고사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여기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같은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이러한 것에 대하여 분명하게 구분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의 말씀은 이것을 연구하거나 조사나 비교로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경계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경계를 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분명한 구분이 있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최전방 초소에서 경계 근무를 서는 군인들은 적과 아군을 분명하게 구분할 뿐 아니라, 누구라도 아군인 것을 보증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불분명하거나,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경계를 맡기지 않듯, 베드로 사도 역시 옛 신앙 속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옛 신앙을 경계하라고 한 것이 아니다.


반면에 옛 신앙을 구분하는 사람이요,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이라는 것을 확증하고 있다. 이제 삶의 마지막을 인지한 대 사도가 보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까지도 새 하늘과 새 땅은 물리적으로 임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 아직 때가 안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 중에서 볼 자가 있다고 하셨다. 그 말씀만 믿는다고 해도 재림이라는 것이 물리적인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어둡기 때문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는 것은 새 생명, 그리고 베드로 사도와 같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며, 옛 신앙 안에서 이전 것과 그 의와 옛 생명의 안목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세상은 언제나 오래되고 낡았으며 문제가 많고 누군가에 의하여 천지개벽이 일어나야 할 정도로 문제가 많은 것일 뿐이다. 


그러나 신의 성품에 참예한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과 그 눈으로 세상을 볼 것이고, 그 보는 것은 그 안에 새로운 하나님의 생명이 있어 그 생명의 눈과 안목으로 보기에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이기에 땅과 하늘도 새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 땅과 이 하늘이 새 것으로 보이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가 다스리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추후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그 생명과 의를 가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은 육신의 삶을 살거나 그 육신의 장막을 벗거나 어차피 하나님의 의가 그 정체성의 본질이고, 그 생명의 본성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이 미국에 가도 대한민국 국민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베드로 사도는 바로 이러한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육신 가운데 있기에 같은 믿음 안에 있을지라도 때로 그것이 분명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음을 알기에 그 사랑하는 사람들, 같은 믿음을 가졌고, 신의 성품에 참예한 사람들에게 분명한 보증을 하고 있는 것이 이 베드로후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성경도 마찬가지지만, 베드로후서를 신학과 같은 학문적 관점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안목으로 봐야 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람이 무엇을 자신의 의로움으로 삼는지, 그것이 가장 본질이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삶을 사는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것에 있어 가장 온전하고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의 의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이나 신앙이 아니라 상식이다.


베드로 사도가 성경을 사사로이 풀지 말라고 한 것도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은 신학적 지식 없이 성경을 보는 것을 사사로운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사사로움이다. 성경은 모든 만민을 위한 것인데 공부를 해야 한다거나 공부를 해야 더 잘 할 수 있다는 논리 그 자체로 이미 복음을 부인하는 것이다. 복음을 부인한 시각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사사롭지 않다면 성경을 보는 것에 있어 사사로움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신의 성품에 참예한 사람들이 가진 그 생명이 형제에게 사랑을 공급할 지경에까지 자라나면 그 과정에서 새 하늘과 새 땅도 임할 것이고, 성경이 어렵지 않을 것이며, 옛 신앙이 분명하게 구분이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생명의 안목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온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생명의 이름이 <그리스도> 그 생명의 신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본성을 가지지 않았다면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겠으며, 그 하나님 아들의 본성을 가진 사람이 성경을 온전히 볼 수 없다면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이제 남은 것은 과연 오늘 나 자신이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 인지, 아니면 <옛 신앙의 안목을 가진 자>인지에 대한 보증 혹은 시인함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베드로후서가 손에 쥐어진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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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2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마가복음 Date : 2019. 1. 22. 21:28 Writer : 김홍덕

선한 행실이 영생을 담보한다고 여기는 신앙의 모습들

영생은 기도하고, 성경보고, 전도하고, 봉사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이를 믿는 것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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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하고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 베드로 사도가 사랑한 사람들, 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비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주셨고, 신의 성품에 참예한 사람들이며 이 베드로후서의 수신자들이다. 이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짧은 서신 안에서 성경을, 또한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있어 함부로 사사로이 풀지 말라는 말씀과 예언이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에게는 풀릴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면서, 이러한 일에 대하여 사랑하는 바울 사도가 또한 그렇게 썼다고 말하면서, 무식한 자들이 다른 성경을 임의로 풀어서 멸망에 이르렀다고 언급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가 이러한 말씀을 하는 것은 오늘날 신학이란 성경에 없는 학문을 공부했거나, 어디 산 속에서 부처가 각성하듯 성령을 받았다면서 그 위세를 가지고서 성경을 함부로 풀지 말라고 하거나, ‘그런 것이 있다!’며 모르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때로 복음이라는 것이 그 믿음의 분량대로 깨닫는다는 것을 고려해서 말씀을 전할 수는 있지만, 어떠하든 결국은 수신자의 몫이기 때문에 말하고 전하는 사람이 감출 것은 아니다.


베드로 사도는 바울 사도가 쓴 글 중의 어려운 것을 임으로 해석하듯이 다른 성경도 억지로 풀다가 멸망을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성경이나 말씀을 억지로 푼다는 것은 자기 안에 그것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없는데 자기 밖에 있는 신학이나 철학이나 심지어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는 옛 신앙의 가치관으로 성경을 풀고 해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열쇠도 가지지 않은 체 문을 열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특히 그런 시도의 대상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런 시도는 그 자체가 이미 멸망에 이른 것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가 이 두 번째 서신을 기록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그 수많은 사건들 중에서 변화산에서 있었던 사건을 언급하면서 예언에 대하여 어떻게 풀 것인지를 말씀하고 또 억지로 풀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의 안목과 가치관을 가지고서 성경을 봐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비단 베드로 사도 뿐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성령을 받아 사도가 되고 또 그 사도들과 같은 믿음을 가졌던 교사들, 집사들 또 성도들이 전하고 나눈 말씀들은 그 어느 한 절도 십자가에 달리는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본성이 되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신학으로 푸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푸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데, 근본도 없는 자들이 신학 없이 푸는 것을 오히려 사사로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반면에 모든 사도와 그 족보를 따라 지금에 이른 온전한 성도들, 곧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성도들은 성경을 보고 푸는 것 뿐 아니라 성경의 어떤 것도 억지로 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자고 아침을 맏이하면 아침마다 새로움을 아는 것이다. 생명으로 아침을 맞는 것이 새로운 날을 맞이하듯,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의 본성이 이끌어가는 모든 순간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다. 이미 학습되었다면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매일 전혀 살아보지 못한 날을 매일 같이 만나도 그 날들은 항상 살아왔던 것처럼 점도 없이 흠도 없이 또 미숙함 없이 언제나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어떤 날을 만나도, 성경의 어떤 부분을 만나도 심지어 성경이 없어도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사는 것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스라엘의 역사와 문화를 다 이해한다는 것과 같이 성경을 아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성경으로 보증되었기에, 정말로 성경을 알고 자기 것이 되었다면, 만물이 하나님의 아들을 고대한다고 말씀한 바울 사도의 말씀과 같이 온 세상의 모든 것에 하나님의 의와 그것이 표현되어 형식을 가지게 된 아들과 같은 교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 근본 됨을 안다는 것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고, 또 그것이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는 삶을 살고 있는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 삶은 그야말로 점과 흠이 없고 온전하며, 성경이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죄(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가 없는 삶을 사는 것이기에 사람의 가치 기준이나 세상의 법과 윤리와 같은 것으로 볼 때 실수 같고 때로 죄를 짓는 것 같아도 그것이 온전한 것이다.


베드로 사도와 많은 사도들이 말씀하고 전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물론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그것이다. 간음하다 잡혀 온 여자를 보고 죄 없다면 돌로 치라고 하시고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은 모든 인생들은 육신으로 간음과 같은 죄 이전에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아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우선되는 죄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 죄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육신의 죄나 세상이나 국가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죄는 가이사의 것이므로 그 법대로 심판을 받으면 그만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그러면 예수만 믿으면 육신의 행실은 아무렇게나 해도 되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 번거롭지만 다시 한 번 언급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세상의 법을 마구 어기면서 죄를 짓는 그런 본성과 생명이 아니라, 오히려 그 법 앞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고 못 박히므로 하나님의 아들임이 드러나는 본성임을 설명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미안하게도 그런 의문을 가졌다면 그 안에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는 사람, 곧 거듭남이 없는 사람이다. 자기 안에 없으니 그리스도만 믿으면 행실을 맘대로 해도 되느냐고 반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본성 없이 성경을 보는 것이 성경을 사사로이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본성만 있으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의 법대로 심판을 받으면 된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리스도만 믿으면 죄를 맘대로 지어도 되느냐고 묻는 것은 그 순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자기 맘대로, 말 그대로 사사로이 정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바울 사도의 말씀과 베드로 사도가 언급한 예언과 또 그와 같은 맥락에서 어려운 성경과 말씀을 <억지로(자기가 가진 그리스도의 정의대로)> 해석한다는 것은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멸망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멸망에 이르렀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생명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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