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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종과 자유를 설명하면서 할례를 예로 든다. 할례를 받는 것은 율법 아래 있는 것인 동시에 종의 신앙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이는 갈라디아교회 안에 의로워지려면 할례를 받으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음을 설명한다. 바울 사도의 입장은 당연히 할례를 받지 말 것을 권면한다. 할례를 받는다면 그리스도가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라고 일축한다.

 

사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다.(16:3) 그리고 반대로 디도에게는 할례를 받지 말라고 권면했다.(2:3)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분명히 이중적이기도 할 뿐 아니라 아들처럼 여기는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행하고 갈라디아 성도들에게는 할례를 받는다면 그리스도가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할례에 대한 바울 사도의 견해는 그가 이중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할례는 예표일 뿐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질을 알고 있다면 할례를 받아도 혹은 받지 않아도 괜찮다. 결정은 복음의 유익을 위해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문제다. 그 맥락에서 갈라디아교회에 의롭게 되는 행함으로 할례를 거론했기에 바울 사도는 그런 이유로 할례를 행하는 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서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단호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본질 없이 의롭게 되려는 행위의 일환으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미혹하는 자들에게 미혹되지 말라는 권면이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할례라는 예식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냐? 아니면 행함으로 되는 것이냐? 라는 주제에서 행함의 대표로서 할례를 논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의로워지기 위하여 할례를 받는 사람은 행함으로 의로워진다는 믿는 사람임은 분명하다. 반대로 믿음으로 의로워지려는 사람에게 할례는 선택사항이다. 즉 자유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는 것이 바울 사도의 말씀이다. 그러니까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여준 서로 다른 입장은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바울 사도는 의로워지려는 목적으로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지는 것이라 선언한다. 율법이라는 것이 100가지를 지키다가 하나를 어기면 모두를 어긴 것이듯, 의로워질 목적으로 율법의 어떤 하나를 행위로 지키려는 것은 의로워지려면 모든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진 것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보이신 예수님과 반대의 길을 가는 것이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3-4)

 

반대로 할례와 같은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소망은 성령으로 말미암는다. 이는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믿음 안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신다는 소망은 거듭난 생명 속에 있는 본성의 일부다. 그리고 이 본성을 가진 존재를 성경은 그리스도라고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바로 이 소망을 가진 생명으로 거듭났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 곧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에게 할례는 받거나 말거나 아무런 효력이 없다. 받아도 되고, 받지 않아도 상관없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와 디도 두 사람에게 다른 태도를 보인 이유이자 그리스도인의 자유로운 모습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앞서 사라와 하갈을 비교한 말씀의 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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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과 자유인은 모든 행동의 동기가 다르다. 이는 갈라디아서의 핵심적 주제인 행함과 믿음이라는 근간이다. 줄곧 설명한 대로 율법과 의로워지려는 행함의 정체성은 언제나 수단이다. 다른 목적이 있다. 복을 받으려는 것 혹은 재앙을 당하지 않으려는 것이 목적이고 행동은 그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 목적이 육신에 있기에 수단도 육신의 행위가 된다. 이것은 변명할 수 없는 증거다. 이것은 종이 육신의 수고를 대가로 주인으로부터 육신의 음식과 평안을 얻는 것과 같다.

 

반대로 자유인의 행위는 자유에서 나온다. 하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거나 벌을 받는다는 압박으로 인하여 행동하지 않고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을 좇아 행한다. 그게 자유인이다. 종은 일하지 않으면 밥 먹기 힘들지만, 아들은 매일 놀아도 밥을 챙겨 주는 것과 같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 신앙인들이 기도하고 봉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은 종의 신앙인 것을 알 수 있다. 자유인은 자기 안에 본성을 좇아 살 뿐인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란 의미다. 괜히 그리스도로 거듭난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거듭난 생명이 그 자유로운 본성 자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언제나 종의 신앙으로 돌아갈 여지가 있다. 이유는 거듭나지 못했는데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착각하기 때문이거나 거듭난 생명이 아직 어리기 때문이다. ‘사도의 권면 속에 있는 교훈에서 언급한 편지 수신자의 구분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사도들이 우리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너희는 거듭났으나 어린 신앙이라면 거듭나지 못했는데 자신이 거듭났다고 믿는 사람들은 미혹하는 자다. 거듭나지 못했는데 거듭났다고 믿는 만큼 종의 신앙이 강해지기에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미혹이다. 거듭나지 못했는데 거듭난 증거를 끊임없이 확보해야 하기에 늘 노력할 수밖에 없는데, 그 노력은 당연히 행함이다. 자기 마음속에 자유롭게 행하게 하는 본성이 없으므로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증거를 눈에 보이는 형식인 육신에서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의 서신은 아직 어린 생명, ‘우리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형제(거듭난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5장에 들어가면 할례를 언급하는데 이는 미혹하는 자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미혹하는 자들이 있고, 그들이 미혹하는 내용이 자기 안에 있는 본성에 어긋나지만 스스로 증거를 찾지 못하는 이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울 사도는 그와 같이 갈등하는 이들에게 너희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라고 확신을 주고 있다.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갈 4:31)

 

다시 한번 우리는 여기서 이 편지의 수신자 대부분이 육신으로 사라의 후손이 아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육체의 혈통으로 자유한 자와 종이 결정되지 않고 믿음이 있느냐로 구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거룩의 어원이 구분하다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믿음 가진 사람을 거룩하다고 하시는 이유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육신으로 유대인이 아닌 사람, 종교적인 이유로 할례를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로 약속하신 언약의 후손이다. 더 분명히 하자면 육신의 혈통에 무관하게 누구나 이 언약의 후손이 되어야 한다. 흙으로 지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지시할 땅, 곧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자리에 이르는 것이 육신 가진 모든 사람의 본분이고 존재의 목적이자 삶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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