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성전이 무너지고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시고 이어서 세상이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고 하셨다. 역사적으로 보면 실제로 예루살렘은 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역사적인 사건으로 현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그 믿음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은 잊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해도 그 일을 예언하시려고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결국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사람을 구한다는 것이 멸망하는 예루살렘과 무너지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람을 구출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님의 구원이 그런 구원이 아니라는 것을 믿으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종말이 세상의 종말이라고 믿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참 막막하다. 예수님의 구원이 망하는 예루살렘에서 사람의 육신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종말 또한 세상의 종말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실제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이 망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본질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께서 본질로 여기시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상징되던 본질은 없고 형식만 남은 신앙이 무너진 것이 성전의 멸망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까 생명의 본성이 행동으로 표현되듯 본질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바로 이렇게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멸망은 언젠가는 이 세상이 망할지도 모른다. 그것에 관해서는 하나님만 아시는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고 중요한 것은 세상이 망해야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예수님의 승천을 보는 사람 중에도 예수님의 재림을 볼 사람이 있다고 하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까 예수님 재림의 전제 조건이라 할 수 있는 세상의 멸망이라는 것은 이 현상계가 망하는 것이 그 말씀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이것을 구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므로 몇 회에 걸쳐서 글을 올렸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망한다는 세상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재림은 또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위해서는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 그 세상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심령을 가진 사람이 가진 세상이다. 같은 날을 살아도 다른 세상을 산다고 하는 말과 같이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세상이 있다. ‘그것만이 내 세상’과 같은 노랫말 역시 같은 개념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 기준으로 세상을 본다. 바로 그 안목과 가치관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의와 기준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 바로 그 세상이 망해야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심령에 재림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멸망과 예수님 재림에 대한 말씀의 본질이다.


사람이 자기만의 기준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신앙이 없어도 다 아는 것이다. 삶은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는 사람과 소금에 찍어 먹는 사람은 다른 세상에 산다. 한 사람은 삶은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어야 옳은 세상이라 여기고 다른 사람은 소금에 찍어 먹어야 바른 세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이 다르니까 그 다른 생각을 한 부부는 이혼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삶은 감자를 무엇에 찍어 먹느냐로 부부가 이혼을 했다고 하면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 하루 그것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한 사람 모두 어떤 사람과 겪은 모든 갈등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내 생각에는 말이야…>라고 하는 자기 기준이 서로 충돌했기 때문이다. 그 충돌이 강하고 약하고, 또 어떤 이는 그런 충돌에 있어 사회적인 훈련과 교육과 개인의 성격 등을 힘입어 크게 충돌하지 않기도 할 뿐 모두가 그런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바로 그 기준, 자기가 볼 때 세상은, 또는 사람은 아니면 어떤 일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가치기준, 그것이 자기만의 세상을 만든다. 바로 그 세상이 망해야 예수님께서 그 사람 심령 안에 재림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세상에서 그 사람은 왕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왕이냐 하면 옳고 그름의 기준을 가진 이가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 왕이 있는 나라에 왕이신 예수님께서 오시려면 그 왕이 망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람이 자기의 선한 기준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선하다 악하다 판단하는 것이 바로 자기 세상이다. 그 세상이 서로 충돌하는 것이 바로 사람 간의 다툼이고 나라 간의 전쟁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세상 안에서 자기가 왕이요 하나님이다. 그러니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무너져야 할 세상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뿌리가 바로 선악과인 것이다. 즉 사람이 선과 악을 먹었다는 것은 사람이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 기준으로 인하여 자기만의 세상, 자기만의 선악의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자기 세상이 건설된 것이다. 바로 그 세상이 멸망할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그 사람 심령 안에 오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승천하신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예수님께서 한 사람의 심령 안에 다시 오시게 되면, 그 사람이 이때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다 무너진다. 자신이 세상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자신이 삶의 의미라고 여기며 목숨이라도 바쳐서 얻으려고 한 것들이 다 무너지고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과 의미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의 모든 빛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빛이 비취는 것이다.


빛이라는 것은 인식이다. 인식이라는 것은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자기의 원대로 사용하여 자신의 의(義) 안으로 물건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다. 즉 빛이 없으면 어떤 것도 자기에게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어두운 방의 선풍기나 책상이나 어떤 것도 빛이 없으면 그것을 자기 목적과 의도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컴퓨터에 어두운 컴맹은 컴퓨터를 자기 의지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컴퓨터에 대한 인식 곧 빛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이다. 즉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원래대로의 인식,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창조하실 때의 목적과 의미와 본질이 인식되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정체성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될 때 비로소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하셨던 대로 인식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빛이다.


그 빛의 상징이 태양과 달과 별이다. 이런 것이 어두워지고 빛을 잃고 떨어진다는 것은 자기 세상에서 자기 기준으로 인식하던 모든 기준이 다 무너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무너짐이고 그것이 회개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는 것이고, 그것이 해가 어두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영광스런 존재로 인식되는 시작이고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는 것,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이요 의로 믿어지는 것이며, 그 때 말씀이 나팔소리로 들리는 것이다. 바로 이 사건이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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