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이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지금으로 치면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의 성전이나 지금의 교회나 신앙의 상징인 것은 차이가 없다. 다니엘에 성전이 있는 곳을 향하여 창을 열고 매일 기도한 것에서 그런 것을 볼 수 있고, 지금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성전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과 생각이 예수님과 달랐다. 아마 이것은 지금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에 대하여 가진 생각과 성경이 말씀하시는 교회가 다르다는 점에서 유대인들의 성전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단순히 그 때 그 말씀으로 볼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오늘 교회에 다니는 사람에 대한 말씀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신앙의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을 책망하시듯 예언하신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정치, 군사적으로 패망하는 것에 관한 예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실 때 예루살렘 성전이 보기에는 성전의 모양을 갖추고 있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제사가 드려지는 등 성전의 기능이 유지되는 것과 같지만, 결정적으로 하나님께서 왜 성전을 지으라고 했는지 그 성전의 존재 목적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말씀하신 것이 핵심이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은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는 시계가 버려지듯, 존재 목적이 상실된 것이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멸망할 것이라고 하신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성전이라는 것의 기본 개념이라고 할까? 그 정체성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 성전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을 사람들에게 지으라고 하신 것은 돌로 지은 성전을 잘 지으면 하나님께서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그 안에 편하게 계시면서 고기 태우는 냄새나 맡고 계시겠다는 계획을 완성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를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려 하신 목적과 이유가 무엇이었든가?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 형상은 하나님의 이미지인데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게 하시기 위한 것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흙으로 지어진 육신을 가지고 살면 그 삶이 하나님의 이미지를 떠 올리게 하는 존재로 지어졌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 그 존재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의 이미지를 표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하셨고 그것이 생령이 되었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 넣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바울 사도는 우리 몸이 성전이라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 안에 넣으신 하나님의 생령은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여기는 생명의 본성이라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생명이고 하나님이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돌로 지은 성전이나 이 시대의 화려한 교회에 거하시기 위하여 지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거하시기 원하시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성전을 지으라고 하신 것이다. 즉 사람에게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을 지으라고 하면 사람이 그곳이 어디든 그 안에 하나님이 거하실 때 비로소 성전이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지으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성전을 지어 놓고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즉 구약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은 제물을 하늘의 불로 태우시는 것으로 나타나셨는데, 이것은 성전이 아무리 멀쩡해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거하실 때 성전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때는 그냥 돌로 지은 건축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도 아무리 의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멀쩡히 살아 있고 또 기능과 능력이 출중하다 해도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거하시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해 주실 것을 기대하고 창조하시고 이 땅에 보냈는데 그렇지 못하면 그건 아무리 멀쩡하고 능력 있어도 죽은 것이고 아무 쓸모없는 것이라서 당연히 예루살렘 성전이 망하듯이 버려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주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그 안에 없는 인생을 쫓겨날 것이라고 말씀 하시는 것이다. 즉 버려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이나 사람이나 그 안에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으신 목적이나 사람 지으신 목적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냥 건축물과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들을 늘 사망 가운데 있는 죽은 인생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성전이나 사람이나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하는 짓이 다 죄가 된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예루살렘 성전은 선지자를 죽였고, 하나님의 의가 없이 살아가는 인생은 삶 자체가 모조리 다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리를 떠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안에 거해야 하는 정체성이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외식하는 자요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신 것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거하시지 않는데 겉만 번지러한 성전이나 하나님의 의는 알지 못하면서 율법적인 행실만 화려한 바리새인이나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성전과 유대인들이 다시 회복되려면 예수님이 찬송 받으실 분이요 주의 이름, 곧 하나님의 정체성을 가진 분으로 만나질 때까지는 다시 예수님 곧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안에 있어 육신이 되신 분을 만날 수 없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건 어쩌면 너무 당연한 말씀이 아닐까?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하신 말씀은 단순히 그 때 그 말씀이나, 이스라엘에 로마에게 완전히 멸망할 것을 예언하시는 예언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시대라도 이 말씀을 읽고 보고 듣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거하시지 않는 사람은 성전이 무너짐과 같이 다 죽은 자와 같다는 것과, 교회 아니라 교회 할애비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거하는 사람이 모여 있지 않다면 그건 그냥 돈 자랑 하는 건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시대 사람들이 정말로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생각도 놀랍도록 똑같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행실을 경건하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리라 생각했듯이 지금의 사람들도 주일날 돈 쓰지 않고, 새벽기도회 가고 졸더라도 예배에 가면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렇고, 예루살렘 성전을 경건히 여기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교회는 유행가를 부르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하는 건물이 아니라고 여기고 또 교회를 화려하고 사람들이 와서 편하고 좋게 여기게 지어 놓으면 사람들이 모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똑같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전은 너무나 화려한 건물이었지만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니 무너졌고, 유대인들의 율법을 지키는 행위는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고 경건하고 도덕적이고 모범적이었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있어 그 생명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었기에 예수님께 늘 책망 받고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듯이, 지금도 교회가 아무리 번듯하고 음향 시설이 좋고 의자가 너무 편하며 화려한 PT 등이 지원하며 성악 전공자들로 가득한 성가대가 노래하고 신학적 스펙으로 충만한 설교자가 설교한다고 해 본들,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고 그런 사람이 모였을 때 교회가 된다는 것을 모르면 모든 것이 거꾸로 된 것이고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하신 말씀의 본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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