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 당시에 그 이전 시대의 선지자들을 기리며 비석을 세우고 의인으로 추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에 대하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변호하면서 자신들이 만약 자신들이 추모하는 선지자의 시대에 살았었더라면 자신들이 추모하는 이들이 피 흘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럴 리 없다고 잘라 말씀하신다.


유대인들의 그런 생각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미 비유로 당시의 유대인들은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잡아 죽이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마 21장)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벨의 때부터 선지자 사가랴의 때까지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들을 죽인 모든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 스스로 강도 바라바 대신에 예수님을 죽여 달라고 하면서 그 책임을 자기들이 지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이 이전에 살았다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그들의 외식이나, 본질을 모르는 그들 안목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인 하나님의 법이 다양하게 표현되고 나타난 것 중의 어느 하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이 어떤 것을 해도 하나님 뜻의 근본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 늘 책망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고, 하나님의 법은 생명의 법이시기 때문에 생명의 본성과 같이 역사하신다. 생명의 법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은 생명이란 그 생명의 본성이 있으면 그 생명이 가진 모든 것이 어떻게든 나타나며,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듯 어떤 상황이나 시절이라도 그 생명이 그 상황과 시절에 맞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는 것이 생명의 법이다.


사실 이건 아주 중요한 것이다. 물론 성경 말씀은 하나씩 떼어내서 묵상하여도 인생을 바꾸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생명의 법이라는 관점으로 표현된 것에서 본다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또한 만물과 여러 가지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한 생명이 보여주는 모든 것이 그 생명의 본성에 종속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보이시는 모든 것도 그와 같이 하나를 이해하면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의에 대한 본질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각개전투 하듯이 종교생활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코끼리라는 생명의 본성인 DNA가 있으면 단단한 상아도 있고, 큰 몸도 있고, 풀을 먹는 본성도 있고, 네 다리가 있고, 가는 꼬리가 다 그에서 비롯되어 표현되지만, 생명의 본성 없이 코끼리를 만들거나 표현하려 한다면 상아를 만들 때는 단단한 재료를, 또 몸집을 만들 때는 가죽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신앙이라는 것이 그랬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하고, 저런 상황에서는 또 다르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렇게 해서 문제가 없으면 또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면 서로 상충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주일 성수를 주장하면서 주일에 쉬지 않는 직장을 다니지 못하게 하려 하니 땅 끝까지 전도하라는 것에 걸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신앙의 교리나 믿는 방식이 서로 충돌한다는 것은 다른 생명이 만난 것과 같은 문제인 것이다. 즉 사자의 몸에 돼지의 심장을 넣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신앙생활이 무지하게 어려워지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성경은 한 하나님께서 하나의 생명으로 표현된 것인데 어떻게 그 안에서 서로 상충될 수 있다는 말인가? 생명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조상들과 자신들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그것에서 이미 그들은 생명이라는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조상과 자신들은 기본적으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당시의 그들이 그렇게 분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그 이전 선지자들을 죽인 조상들의 생각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생명을 모르니 생명을 전한 이들을 죽인 조상이나, 생명을 모르니 조상과 자신들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생명이란 그런 것 까지 같은 것이다.


또한 외식이라는 것도 다른 것이 아니다. 속과 겉이 다른 것이다. 속과 겉이 다르다는 것은 양의 탈을 쓴 늑대와 같은 것에 국한된 의미가 아니다. 겉이 속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보여주는 모든 신앙적인 모습이 생명이 그 속에 있어서 그 생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당연한 것은 그들은 생명의 법, 하나님의 생명의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성경 말씀을 보는데 이것을 지키려니 저것이 걸린다고 느껴지는 안목을 가지고 있다면, 성경이 서로 상충되는 것이 있다고 보이는 시각을 가졌다는 것은 성경을 바라보는 안목에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비롯된 안목이 아니라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신학이나 학문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해결방법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생명이 없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 생명의 말씀은 기본적으로 성경 말씀이 우리를 살리는 말씀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생명이라는 것은 생명의 본성만 있으면 그 생명의 모든 것이 감추려 해도 표현되는 것이듯 생명의 말씀이 그 안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모든 것이 하지 않으려 아무리 애를 써도 게가 옆으로 걷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없듯이 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말씀은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나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여기시는 그 생명이 사람 안에 있으면 어기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지킬 수밖에 없는 그런 생명인 것이다. 그 생명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살아 있는 것이고, 그것이 있으면 아무리 하나님을 떠나려 해도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내며 살게 되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자신들이 옛날에 살았다면 선지자들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생명을 몰라서 그렇다. 생명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바닷게가 어제는 바로 걸었는데 오늘 옆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알았다면 옛날 선지자를 죽인 그 본성이나 자신들의 본성이 같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그들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며, 그랬다면 하나님께서 살아있다 하는 생명을 얻을 것이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도 만약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상황과 시대에 따라 성경이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하나의 성경이 서로 상충되는 것으로 자기에게 의문이 든다면 자기 안에 하나의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즉 유일하신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명에는 만약이라는 것이 없다. 생명은 그냥 그 생명일 뿐이다. 단순한 것 같지만 생명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생명도 이와 같다. 그렇다는 것은 그 생명만 있다면 성경의 모든 말씀을 지키지 않으려 해도 지키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은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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