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3:13-24 소경된 인도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8. 3. 11:32 Writer : 김홍덕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마 23:16-17)


위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것은 비단 이것 뿐은 아니다. 성경 마태복음 23장은 장 전체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책망하시는 내용이다. 그 중에서 13-24절까지의 내용의 핵심은 아마 <소경된 인도자>가 아닐까 생각된다. 소위 말하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책망하시는 내용을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생각이 정말로 터무니  없는 생각이라는 든다. 옛날 어떤 종파에서는 성전 성수를 담은 컵에 파리가 빠지면 잔이 더러워진 것인지, 아니면 파리가 거룩해 진 것인지를 가지고 논쟁했다고도 하는데 그런 것을 보면 예수님의 책망이 옛날 유대인들의 어리석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내용은 지금도 해당이 된다. 예수님께서 지금 책망하시는 것은 맹세에 관한 것이 아니다. 무엇이 본질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경>은 육신의 눈이 어두운 것이 아니라 <본질>을 보지 못하는 안목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맹세에 관하여 율법을 해석해 놓은 것으로 들추어내시는 것이다.


성전과 성전의 금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면, 또 제물과 제물을 올리는 제단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면 어떤 것이 본질에 가깝고, 어떤 것이 목적에 더 가까운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맹세를 한다는 것은 그 선택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성전보다는 성전에 있는 금이, 제단보다는 제단 위의 예물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성전이 있기에 성전의 금이 있고, 제사와 제단이 있기에 예물이 있는 것인데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나타난 것이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라.(히 11:3)

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다. 모든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뜻이 형상화 된 것이라는 것이다.


성전에 금을 치장하는 것은 금의 가치로 인함이 아니다. 그것은 성전의 정결하고 귀함이 금으로 표현된 것이다. 성전의 제단에 예물을 바치는 것은 예물이 먼저 있고 예물 때문에 성전에 제단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 곧 인생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존재로 드려지는 것이 먼저 있었기에 그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예물을 바치는 것이다. 즉 예물의 존재 목적이 예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제사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한 결 같이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제사장들을 책망하시고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신 것이 결국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그 목적이 먼저 있고, 목적이 표현된 것이다. 그런데 표현된 것을 본질로 알고 그것을 목숨을 다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자신들도 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옷과 거룩한 행실로 감춘다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목적이 안에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내는 것이 안 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다 아시는데 예수님 앞에서 율법을 지킨다면서 자신들의 부정함을 감추는 것이다. 그래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은 실존하시지만 형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신 것이다. 그것이 세상과 사람이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사람은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질은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께서 스스로는 영이시므로 자신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할 형식으로 세상과 사람을 만드신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모르면 소경이다. 이것을 모른다는 것은 단순히 이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과 사람을 만드신 이유, 세상과 사람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와 목적을 모르면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 왜 있는지, 자신은 왜 사는지를 모르고 살게 되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도 문자 그대로 지키려 하고 왜 그런 말씀을 주셨는지는 생각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맹세에 대하여 책망을 받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그 모습은 지금도 항상 있다. 성전에 금을 사용하는 것은 성전이 가진 귀함이 금으로 표현된 것인데도 성전으로 맹세한 것은 구속력이 없고 금은 구속력이 있다고 하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 표현된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인데, 그것을 몰라서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다. 그것처럼 지금은 교회를 크게, 그리고 아름답고 최신식으로 지으면 사람들이 모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데 그것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둘 다 예수님께 책망 받을 일인 것이다.


성전 기물을 금으로 만든 것은 성전과 같이 사람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인생이 금과 같이 귀한 존재라는 의미를 표현한 것이지, 금이 성전을 대변할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듯이, 교회도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정말로 아름다운 것이라 여길 수 있는 것을 전해줄 수 있다면 굳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면서 까지 크고 화려하게 짓지 않아도 온전하고 하나님께 영광스런 교회가 되는 것인데, 본질을 모르다 보니 교회는 크고 좋게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주객과 선후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성경 말씀을 지키는 것 역시 같다. 모든 성경 말씀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본성 없이 행위로만 성경을 지키려 한다고 성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로 정확하게 말한다면 성경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지키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의지를 가지고 노력해서 지키는 것이 아닌 것이다.


흔한 예로 노래방에 가는 것이 죄냐 아니냐 논하기도 하고, 주일 성수하기 힘든 직장을 가지는 것이 가하냐 아니냐 하는 논란도 늘 있다. 그런 논란이 끝을 내지 못하는 것은 노래방에 가는 것이나 직장에 다니는 것은 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누가 노래방을 가고, 어떤 직장 이전에 직장에 가는 사람이 누구인가가 먼저인데 그것을 이야기 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인지만 정해지면 그 사람은 자기 정체성에 맞는 자리에 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 시대의 신앙에 있어서도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안목이 충만하다 싶을 정도로 만연한 가운데 있다. 성경 말씀을 지켜 행하면 존재가 바뀐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 그것이다. 행동으로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는 것이다. 성경을 지켜 행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성경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성전을 금보다 더 구속력 있는 맹세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로 이것을 보지 못하는 안목은 전부 소경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지 못하면서 표현된 것에만 밝아서 그것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자는 모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경된 인도자다. 그런 소경된 인도자는 교회에 모인 사람을 하나님 보실 때 화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화려하게 짓는다. 화려하고 영광스럽다는 것이 세상적인 기준과 전혀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건물이 화려한 것이 아니라, 그 심령에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온전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요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나타난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증거를 받은 믿음일 수는 있지만 약속을 받은 믿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증거는 약속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성전의 금은 성전이라는 약속의 증거인 것이다. 더 정확히는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의가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를 세상에서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금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금이 가장 귀하듯 하나님이 보실 때는 사람 안에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말씀과 의가 거하는 사람이 가장 귀하다는 것이다. 그 약속과 하나님의 의가 성전 기물을 금으로 만들게 한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제 아무리 종교적으로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도 그냥 소경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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