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대화를 하시면서 “내가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느니라.(요 8:58)” 하심으로 유대인들을 놀라게 하신 말씀이 있는데, 지금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주가 됨을 말씀하시고 계신다.


육신의 족보로 보면 다윗은 말할 것도 없고 아브라함이 예수님보다 훨씬 앞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아닌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것을 인정해도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사시는 시대는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보이지도 않는 가마득한 옛날 사람인데 아브라함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라고 하시고 또 모든 유대인들이 왕 중의 왕으로 인정하는 다윗인데 그 다윗에게 예수님께서 주가 되신다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건 상식적으로 보면 당연히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것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이렇게 말이 되지 않는 것을 그저 ‘예수님이니까…’라며 믿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 같지만 그건 믿음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는데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우리와 상관이 있는 것이라서 하신 말씀이니 더더욱 그렇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보다 다윗보다 먼저 되고 주가 되시는 것은 육신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가지신 그리스도라는 그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라는 그 정체성은 아브라함 아니 아담보다 먼저 있었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은 인생의 본질이기에 다윗 아니라 어떤 위대한 자도 다 그 정체성에 따라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집을 지을 때 완성된 집 보다 집에 대한 설계도나 아니면 집 주인이 생각하는 집의 모양이 먼저인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사람에 대한 계획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미지를 말한다. 즉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해낼 수 있는 존재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바로 그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 그 정체성이 바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보다 그리스도가 먼저인 것이고 그리스도가 주가 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도 그것 때문이다. 사람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내용을 예수님 안에 가지고 오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육신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 육신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실 때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그대로 있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그저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 하나님께서 아들 삼으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 또한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한 것이 나의 것이 된다는 것, 나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여기시는 성품을 가진 자로 살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믿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가지신 정체성이고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 하나님의 의와 뜻은 세상이 만들어질 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이유이므로 모든 인생보다 당연히 먼저 있는 것이고, 모든 인생의 주인과 같은 하나님의 의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본체이시니 당연히 아브라함보다 먼저고 다윗의 주인이시며 또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에게 영원한 표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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