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 유다를 제외하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도망간 것은 분명 일차적으로 배신의 모양새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그때까지 왕이 되는 그리스도라면 목숨이라도 버릴 각오였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는 상상도 하지 못한 예수님, 그리스도기에 자기가 알지도, 깨닫지도, 동의하지도 않은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칠 이유가 없었습니다. 가야바의 뜰에 있던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히려 베드로는 거기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기에 어떻게 된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베드로가 부인한 것은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우상이었습니다. 자기로서는 말 그대로 죽었다가 살아나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안다고 할 양심이 없었고, 그런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이유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배신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님께 덧입혀 놓은 자기 그리스도입니다.

 

이 베드로의 모습은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교훈을 주는 모습이지만, 베드로의 모습을 좀 더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21장의 모습 속에 우리는 어떤 분위기를 느낄 수 있나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고기도 많이 잡히고 만찬을 나누고 있으니 기뻐하는 것 같은 분위기인가? 그게 아닙니다. 이 순간까지도 제자들은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십자가를 지는 존재라는 걸 용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자기들이 부활한 하나님 아들을 눈 앞에 보고 있지만 전혀 즐겁지 않은 모습입니다.

 

유명한 “네가 날 사랑하느냐?”라는 대화도 가야바의 뜰에 있던 베드로의 모습만큼 큰 오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번째와 두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 속 사랑은 ‘아가파스 (ἀγαπᾷς)’ 우리가 아는 그 아가페 사랑의 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두번 모두 “주님은 내가 주님을 ‘필로 (φιλῶ)’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게 사랑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세번째에는 같은 어근의 말 ‘필레이스 (φιλεῖς)’로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역시 ‘필로 (φιλῶ) ‘로 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를 하느냐?”라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아닙니다 저는 인간적인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필로 (φιλῶ)’는 친구, 인간들의 사랑을 말합니다. 필라델피아라는 미국의 지명이 여기서 유래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순간에도 베드로는 아주 정직했습니다. 자기는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임에도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리스도라는 분은 이해할 수도 없고, 믿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막나간 해석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의 극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입니다. 성령에 크게 감동한 베드로가 일어나 처음 한 말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그리스도다”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 되게 하셨느니라” (행2:36)

 

 

이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약속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5)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